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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종 도로시 데이,거룩하고 엉뚱한

모든 2 2021. 12. 17. 09:22

주님의 종 도로시 데이, 거룩하고 엉뚱한

짐 포레스트

 

  도로시 데이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도로시 데이가 성인이 된다면, 그녀는 노숙인들을 돌보는 사람뿐 아니라 화를 내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너무 성급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녀는 "나는 당신이 평생 동안 참을 수 있는 것보다 1분 안에 더 많은 화를 참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수프 만드는 비법을 비꼬는 질문을 던진 대학생에게 "야채는 손가락에서 피가 날 정도로 썰었다."고 답했습니다. 자신을 성인처럼 취급하는 기자에게 "나를 성인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렇게 쉽게 이웃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로시 데이는 거듭해서 "우리는 모두 성인으로 부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에게 성인이란 다른 사람들과 다른 DNA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지요. 거룩함은 단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평범한 것입니다.

 

  편지 작가들의 수호성인

 

  도로시 데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열아홉 살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순 둘이었고요. 지금 제 나이보다 아홉 살 어렸던 거지요. 이것은 그녀를 만나온 반세기 동안 그녀가 매일 나를 격려하고 매일 나를 꾸짖어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가 1980년에 죽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나는 스탠튼 아일랜드의 가톨릭일꾼 농장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지역 사람들과 낡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지요. 그녀 앞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낡은 찻잔이 놓여 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 책상 위에는 늘 편지 더미가 쌓여 있었습니다. 가톨릭일꾼은 매일 많은 양의 우편물을 받았는데, 대부분 도로시데이에게 온 것입니다. 그녀는 종종 편지를 큰 소리로 읽으며 편지를 쓴 사람들에 대한 한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매년 수많은 편지와 메모를 답장으로 썼습니다. 사실 도로시 데이는 삶의 상당 부분을 편지를 읽고 쓰는데 보냈습니다. 그녀가 <가톨릭일꾼> 신문에 연재하던 '순례에 관하여'라는 칼럼은 대부분 긴 편지에 불과했습니다. 도로시 데이가 시성된다면 그녀는 편지작가들의 수호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통로

 

  도로시 데이의 하루는 바쁘고 복잡하고 스트레스가 많았고, 종종 그녀는 여행은 떠났습니다. 딸과 손주들을 방문하고, 다른 가톨릭일꾼 공동체를 방문하고, 이런 대학 저런 신학교, 지역 본당에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청중들 안에서 메모도 없이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말을 할 때 수사학적인 세련미도 없었고, 어떤 수줍음 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동시에 지혜와 확신, 겸손과 믿음, 용기를 전하곤 하였습니다. 그녀는 청중들을 어리석은 사람들로 느끼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메시지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했고, 늘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예외 없이 누구나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는 환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누구나 불청객을 환대하는 '그리스도의 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그리스도는 갈 곳이 없고 그를 영접할 사람도 없는 이방인, 불청객, 낯선 얼굴들 안에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참으로 무신론자입니다."라고 그녀는 자주 말했습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는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는지 알려주는 '최후의 심판'이야기가 나옵니다.

 

by Sarah Fuller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아들아, 와서,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34-36,41-43)

 

  놀라운 텍스트입니다. 우릭 구원받은 것은 신학에 탁월했거나, 놀라울 정도로 영리했거나, 큰 영예를 받았거나, 성덕에 관한 책을 썼거나, 한 번도 곤경에 처하지 않았거나, 실수를 한 적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통로를 열어놓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늘 소란하지만 고요할 때도 있습니다.

 

  1961년에 내가 성 요셉 일꿈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 집은 크리스티 거리의 바우어리에서 한 블럭 떨어진 낡아빠진 3층 건물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암울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지금은 훨씬 나아진 이스트 빌리지였습니다. 내부에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 사람들은 테이블 3개 중 하나에 자리를 잡거나 위층에 있는 옷방으로 가기 위해 줄을 서 있곤 하였습니다.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도로시 데이의 사무실은 정문 바로 안쪽에 있었는데, 책상 하나를 들여 놓기에도 작아보였습니다. 나는 짧은 기간 동안 <가톨릭일꾼> 신문의 편집장으로 일했고, 그녀와 나는 이 사무실에서 다음 호에 무엇을 실어야 할지 토론이나 논쟁을 하였죠. 1층은 음식을 준비하고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끄러운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은 우리들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한번은 도로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거룩한 고요함!"(Holy silence!)이라고 외쳤습니다. 몇 분간이지만, 사방이 고요해졌습니다.

 

  2층에는 탈의실 옆에 매일 기도하고 묵주신공을 하던 경당이 있었습니다. 일꾼의 집에는 '직원'(자원 봉사자로 온 사람들)과 '가족'(한때 밥을 먹고 옷을 얻으러 오던 사람들)이 섞어 있었는데, 일꾼의 집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또 다른 의미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편안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합류할 당시 도로시 데이는 스프링 가에 있는 공동주택 6층, 월세 25달러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두 개의 작은 방, 싱크대 옆에 욕조가 있었습니다. 복도에 빗자루 옷장 크기의 화장실이 있었고요. 어울리는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도로시 데이는 이 동네를 충분히 사치스러운 곳으로 여겼습니다. 길 건너편에 이탈리아 빵집이 있어서 오븐에서 빵 굽는 냄새가 자주 났고, 이탈리아 오래의 매력적인 향수가 항상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요 자매

 

  뉴욕 대교구가 도로시 데이에 대한 시성 정원을 시작하고서, 로마 교황청은 그녀에게 '주님의 종'칭호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도로시 데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가 성인답게 한 일은 뭐가 있냐는 비판도 여전했습니다. 그녀의 삶과 증언, 글은 뭐가 있나는 비판도 여전했습니다. 그녀의 삶과 증언, 글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고, 짜증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노숙인들에 대한 환대조차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그 사람들이 세상을 개혁하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에 비판했습니다.

 

  도로시 데이의 생각은 파격적이어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어느 날 사회복지사가 도로시 데이에게 찾아와 "일꾼의 집에 머무는 노숙인들은 언제 나가냐?"고 물었습니다. 도로시는 "우리는 그들이 영원히 머물게 두었습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일꾼의 집에선 노숙인들을 기간을 정해 받거나 내보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와 함께 죽고 우리는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 매장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죽은 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입양된 이는 누구나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그들은 항상 가족이었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은해 계좌에 얼마 남았는지 지나치게 걱정하는 편이 아닙니다. 일꾼의 집에 들어온 돈을 가급적 빨리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해 줍니다. 어느 날 일꾼의 집을 방문하는 잘 차려입은 여성이 도로시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방문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반지를 주머니에 넣었고, 나중에는 공동체 안에서 '족제비'로 알려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쓰라린 불평을 늘어놓는 불쾌한 노파에게 그것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매달 그녀에게 집세도 내주곤 했습니다. 그때 직원 중 한 명이 도로시에게 반지를 웨스트 47번가에 있는 다이아몬드거래소에 팔아서, 캐서린의 집세를 내는 데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그 노파 역시 품위가 있는 인간이고, 그 반지를 원하는 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고, 바하마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도로시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내준 여성처럼 자기 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도로시 데이가 오히려 그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당시는 하느님이 부자들만을 위해 다이아몬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나요?"

 

  내 삶의 토대를 흔들던 사람, 도로시 데이

 

  도로시 데이의 가장 큰 업적은 아마 우리에게 사랑의 '작은 길'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작은 길'에 이끌린 것은 주로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인의 글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용어는 없습니다. 그녀가 말했듯이 "서류 작업, 집 청소, 하루 종일 오는 수많은 방문객을 상대하고, 전화를 받으며 인내심을 유지하고 현명하게 행동하는 것은 지금 내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화의 일이며 종종 아주 작은 길처럼 보입니다."

 

  도로시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고 문자 그대로 복음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 일의 결과로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도로시 데이에게 "당신의 삶은 부양해야 할 가족과 지불해야 할 대출이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하지만 나머지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어떻습니까?' 물었습니다. 그 나머지란 제 아내와 나를 포함합니다. 우리에게는 6명의 자녀가 있고, 적어도 8명의 손자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로시 데이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 많이 갖고 너무 적게 줍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비열함이나 이기심을 극복하려고 할 때마다 도로시 데이를 생각합니다.

 

  내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것을 소유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때마다 도로시 데이의 '자발적 가난'을 떠올립니다. 내가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은 타인에게 나누어 줄 때마다, 그 낯선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도로시 데이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전쟁을 예장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한 노력에 참여할 때마다, 또는 세상을 덜 잔인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캠페인에 참여할 때에도 도로시 데이는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내가 그리스도, 교회, 성사 생활, 성경,진실 말하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 덕분입니다. 그녀는 독서에 관한 나의 취향을 결정했으며 - 도로시 데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등 러시아 문학을 참 좋아했다. - 내가 믿음과 소명을 깨닫고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도로시 데이가 내 삶의 중심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로시 데이는 내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도운 여성입니다. 그녀는 40년 전에 사망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재의 수요일 강론을 하면서, 베네딕토 16세 교종께서는 도로시 데이를 "개종자의 모범"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뉴욕대교구의 티모시 돌란 추기경은 그녀를 "우리 시대의 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몇 년 전 그녀의 손자 중 한 명인 케이트 헤네시는 <가톨릭일꾼>에 기고한 글에서 "그녀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집을 주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우리의 삶의 기초 자체를 흔들었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삶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다른 삶을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참고기사 출처] portsmouthinstitut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