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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와 토머스 머튼에 관하여
짐 포리스트에게 듣다
20세기 영적 거인이며 가톨릭일꾼운동의 공동설립자인 도로시(Dorothy Day)와 유명한 트라피스트 수도자이자 작가인 토머스 머튼(Thomos Merton)을 둘 다 알고 평전을 쓴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직 <가톨릭 일꾼> 신문의 편집장이었던 짐 포레스트는 두 사람의 평전을 썼고, 그의 독특한 통찰력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아직 공식화 되지 않았지만 성인으로 추앙받는 두 인물의 인간적 측면을 보여줍니다.
도로시 데이와 토머스 머튼,이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이 왜 사그러들지 않는가. "머튼은 몇 년이 지나도 개화를 멈추지 않는 특정 식물처럼 다년생 식물입니다."라고 짐 포리스트는 말하는데 머튼은 1968년에 사망했지만 머튼의 책은 지금도 1~2년에 한 번씩 계속 출판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로시 데이가 시성 절차를 밟으면서 그녀가 누구인지 점점 더 궁금해 합니다.
도로시 데이와 머튼의 친밀한 우정은 비폭력에 대한 공통의 헌신과 자비의 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들은 어떤 이유로든 폭력을 처음부터 거부했던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는 소망을 공유했습니다. "누군가 세례를 받으려면 이제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했습니다."라고 짐 포리스트가 말합니다. "머튼과 도로시 데이는 교회가 2천 년 동안 다락방에 밀어두었던 상자의 포장을 풀어놓은 사람들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뉴욕에 살았고, 토머스 머튼은 켄터키 시골의 수도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서로 알게 되었을까요?
1960년에 처음 가톨릭 일꾼에 왔을 때 나는 여전히 해군에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19살이었고, 미국 기상청에서 젊은 기상학자로 일했고, 일요일에 워싱턴에 있는 작은 기관에서 아이들을 미사에 데려가는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나는 이 특별한 교구의 도서관에서 <가톨릭 일꾼> 신문을 발견하고, 이 신문을 발행하는 도로시 데이란 여성이 누군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느 주말에 저는 '가톨릭일꾼'에 대한 호기심으로 워싱턴에서 뉴욕에 있는 가톨릭일꾼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뉴욕에서 저는 아일랜드에 있는 그녀에게 가져갈 우편 가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여섯 명의 사람들과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아 있었는데, 그 편지 가운데 하나는 토머스 머튼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저는 도로시 데이가 토머스 머튼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은 모두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일꾼운동을 하던 도로시 데이는 주기적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갔지만, 수도자였던 머튼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도로시 데이는 반전운동에 참여하면서 보통 가톨릭 신자들의 관점에서는 가려져 있는 인물이었지만, 당시 토머스 머튼은 이미 세계의 유명한 가톨릭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머스 머튼 역시 반전운동에 관심이 있었죠. 머튼은 <가톨릭 일꾼> 신문에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는 연재물을 투고했습니다.
이 두 사람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소개하시겠습니까?
저는 사진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두 경찰 사이에 앉아서 체포를 기다리는 75세의 도로시 데이 사진입니다. 아마 이건 도로시 데이가 마지막으로 연행당할 때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도로시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녀는 불의를 보고 "분노 없이 끈기있게"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마치 물총을 쏠 준비가 되어있는 두 아이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할머니처럼 이 두 경찰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두 소년과 그들의 큰 총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토머스 머튼은 수도자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내가 머튼을 처음 보았을 때를 기억합니다. 그의 책에는 작가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그이가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루 종일 단식하는 아주 마른 사람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수도원에서 머튼을 보니, 그는 발을 공중에 얹고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서 있었고, 너무 세게 웃어 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머튼의 초대를 받고 수도원에 가는 길 자체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형편이 좋지 않은 상태여서 히치하이킹을 했습니다. 1962년 겨울이었는데, 가톨릭일꾼에서 만난 친구 밥 울프와 내가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는 최악의 날씨였습니다. 그곳에 오기까지 이틀 반이나 샤워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몸에서 냄새도 많이 났을겁니다. 일단 지나친 경건함으로 나는 경당에 먼저 들렀지만, 밥은 먼저 손님방에서 쓰러져 누웠습니다. 나중에 방으로 돌아가니, 수도원인데도, 방에서 머튼과 밥은 큰소리를 내며 웃고 있었습니다.
머튼은 만난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었나요?
오프라 윈프리와 같은 사람을 만난 것에 비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머튼의 자서전 <칠층산>은 베스트셀러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인생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아마도 지난 200년 또는 300년 동안 출판된 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종교적 자서전일 것입니다. 그 책을 쓴 뒤로 머튼의 책은 나오는 대로 자동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모두 수도승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좀 더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수도원 같은 자신만의 장소를 스스로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인생의 핵심, 삶의 중심이 될 만한 어떤 종류의 닻을 발견했고,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방식으로 영적인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잘 알려져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가톨릭일꾼'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만난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그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일꾼은 전국에 '환대의 집'이 있었습니다. <가톨릭 일꾼> 신문은 매달 10만 부씩 인쇄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가톨릭 간행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도로시 데이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녀의 자서전 <긴 외로움>*(The Long Loneliness)를 읽어보면 됩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고백>(도로시 데이), 복 있는 사람, 2010)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토머스 머튼과 도로시 데이는 어떻게 친구가 되었습니까?
편지로 우정을 맺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가장 오래된 편지는 1956년 12월 도로시 데이가 머튼에게 보낸 것입니다. 머튼이 그녀와 가톨릭일꾼을 위해 성탄절 미사를 봉헌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것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하는 감사의 마음을 머튼에게 전하기 위해서였죠. 그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매우 아름다운 성탄절을 보냈고, 또한 꽤 진지한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과거에는 주방 전체가 술에 취해 삶이 복잡해지는 일이 많았지만 올해는 참을 만 했습니다." 그 다음 편지는 1959년 6월에 도로시 데이가 보낸 답장이 늦어진 것을 사과하며, 처음 <칠층산>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전했습니다. 그 책은 머튼이 1948년에 도로시 데이에게 보내 준 책이었습니다. 이처럼 사실상 머튼 1948년부터 이미 도로시 데이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토머스 머튼이 도로시 데이와 가톨릭일꾼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머튼은 젊은 시절에 자신의 거취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공부하고 있던 콜롬비아 대학근처의 할렘에 있는 캐서린 도허티(Catherine Doherty)가 세운 '우정의 집'(Friendship House)에 갈지 아니면 겟세마니 수도원을 찾아갈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수도원 생활은 자신의 성소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기도만큼 자비의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늘 기도와 자비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일꾼을 알고 나서는 도로시 데이를 통해 자신도 자비의 일에 자신도 참여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는 1963년 12월 편지에서, 도로시에게 "가톨릭 일꾼과 그런 형태의 증인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가톨릭교회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머튼은 평화에 대해 공감하고 있었지만, 그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좀 달랐습니다. 장상인 겟세마니 수도원 총원장은 머튼이 전쟁과 평화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머튼이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며 그리스도교 평화론을 담은 책을 내려고 했을 때 이를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많은 이들이 등사판으로 돌려 보았습니다. 머튼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자비의 행위뿐 아니라 비폭력적이고 무장해제 된 삶을 주장했고, 이런 평화주의적 견해를 잘 모르고 어리둥절하는 신자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도로시 데이는 머튼만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각주도 해설도 없이 언제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성미였습니다.
머튼은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목소리를 바꾸었습니다. 머튼은 퀘이커 교도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퀘이커의 어휘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무슬림과 이야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얼핏 보기에 대화가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이들과 대화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데 머튼은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도로시 데이는 불교도들과 대화 할 수 있는 어휘가 없습니다. 그녀는 너무 가톨릭이었습니다.
머튼은 도로시 데이의 기도생활에 도움이 되었나요?
도로시 데이는 이미 충분히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가톨릭일꾼운동을 오래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토머스 머튼을 포함하여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도로시 데이처럼 훈련된 영적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매일 미사를 드리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고, 매주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어느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가톨릭일꾼에 낮 동안 사용할 수 있는 기도서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가톨릭일꾼들은 기도서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사용했고, 그들은 더 많은 기도서를 저희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도로시 데이의 접근 방식은 머튼과 어떻게 다릅니까?
어느 날 밤 도로시 데이가 워싱턴 스퀘어공원 근처에 있는 뉴욕대학교에서 연설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전쟁을 반대하는 도로시 데이의 입장에 대한 반감을 지녔던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당시는 냉전 분위기가 강했고, 도로시 데이의 입장이 애국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질문했습니다. "데이 씨, 당신은 적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하지만 소련이 침략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로시 데이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제가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팔을 버리고 그들이 환영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청중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도로시 데이의 이런 대답은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천둥번개처럼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사실 복음이 주는 단순함입니다. 내가 알기에, 도로시 데이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당황하거나 사과하지 않을만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 질문을 한 청년이 도로시 데이의 대답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는 아마도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며, 여전히 충격에 쌓인 채이겠지만, 도로시 데이 안에는 대단한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말만이 아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때때로 험악한 상황에 봉착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들을 온유하게 대하고,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머튼과 도로시 데이가 오늘날의 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로시 데이는 '창조적 비폭력을 위한 목소리'(Voices Crdative)의 캐시 켈리(Kathy Killy)와 다른 평화운동가들이 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이라크로 가고, 아프가니스탄으로 가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돕고, 글과 사진을 통해 세상이 인간에게 하고 있는 폭력을 알릴 것입니다. 며칠 전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마케트 대학에서 평화운동가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미군들의 헬멧을 보았고, 총을 들고 어린 아이의 시체를 잡고 있는 군인은 분명히 울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신문에서 볼 수 없는 전쟁의 현실이며, 도로시 데이는 젊은이들이 전쟁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할 것입니다. 머튼은 전쟁에 관해 이야기할 때.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직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쟁의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린다면 쉽게 전쟁을 옹호하지 못할 것입니다.
머튼은 유머 감각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어떻습니까?
도로시 데이에 관한 일화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아주 잘 차려입은 여성이 환대의 집에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도로시 데이에게 건넸습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하도록 감동시켰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도로시 데이는 소람스럽지 않고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잠시 후 우리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여성이 나타났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캐서린이라고 기억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족제비"라고 불렀습니다. 늘 도움을 받으면서도 별로 감사할 줄 모르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로시 데이는 대뜸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당신을 위해 줄 것이 있어요." 하고는, 그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습니다. 나중에 도로시 데이에 가서 이렇게 말한 사람이 나인지 다른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도로시, 그 반지를 웨스트 47번가의 다이아몬드 거래소로 가져가 팔아서 돈을 변통해 줄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도로시 데이는 "글쎄요, 그녀도 반지를 팔고 바하마에 가고 싶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반지를 끼고 싶을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부자들만을 위해 다이아몬드를 만드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로시 데이와 머튼이 비슷한 점은 무엇인가요?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자꾸 보면 볼수록 서로 보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 모두 세상과 분리되지 않으면 서로 깊이 뿌리박힌 영적 삶에 대한 급진적인 탐구를 대표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을 사랑하고 대표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듣지만, 대개는 둘 중 하나를 우선시 합니다. 토머스 머튼과 도로시 데이는 각자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을 조금 다르지만, 인생과 신앙을 바라보는 척도는 매우 비슷합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하느님을 저희에게 설득하고 있는 거지요.
※ 이 글은 <US Catholic> 2010년 11월 호에 실린 기사를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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