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3
FM라디오에서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방송이 나오는 오후 여섯 시, 석굴암을 머리에 이고 있는 토함산 위로 펼쳐진 하늘이 온통 먹빛 품은 파랑이다. 깊디깊은 물빛이 이러할까 속 깊은 사람의 눈동자가 이런 빛일까 알 수 없으나 석굴암 범종 누각이 형체를 가늠하는 곳에서 등을 밝혀, 캄캄한 밤에는 그 불빛이 하늘에 홀로 떠 있는 것 같다.
경주에 자리 잡길 잘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요즘은 토요일마다 경주박물관대학엘 간다. 교양 수준이기는 하지만 고고학, 역사학, 민속 학, 불교학, 건축학 등을 두루 배우고 있다. 경주 주변에 널려 있는 고적(古跡)을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서 석탑과 불상 등 불교미술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한 달에 두 번씩 일요일에는 고적 답사를 다닌다.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 별로 없고 성한 유물이 많지 않기에, 그냥 보면 그저 투박한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물건과 흔적들이다. 그러나 그 안에 배어 있는 파란만장한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면, 저마다 생생한 의미로 다가온다.
며칠 전에는 남산엘 올라갔다. 어렵사리 골짜기를 헤집고 다니며 남산 부엉골 마애여래좌상과 약수골 마애대불(磨崖大佛)을 친견(親見)하였다. 마애대불은 어찌된 일인지 머리가 달아나고 없었지만, 그 어깨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아직 푸르고 붉은 숲이 다가왔다. 골짜기에 흔적만 남아 있는 샛길을 찾아 돌아다니다 보니,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숲 길가에 불쑥 나타나곤 하던 돌부처와 돌탑이 꿈에서 본 영상인 듯 아득하다. 남산에는 수많은 부처와 탑신이 널려 있다고 하는데, 그리로 인도하는 신작로는 없었다. 미끄러지면서 조심조심 발을 내딛어야 닿는 불국토(佛國土)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예술치료를 공부하면서, 몇 차례 만다라(曼陀羅)를 그릴 기회가 있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화면에 옮길라치면 자주 떠오르는 게 있었는데, 그것이 사슴이었다. 큰 산등성이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슴 한 마리. 그 산등성이 위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나무의 형상은 사슴의 뿔을 닮아 있었다. 이를테면 뿔처럼 나무를 이고 있는 산 위에 또한 뿔을 가진 사슴이 서 있는 모습이다. 박물관대학에서, 신라의 금관은 출(出)자형 장식을 달고 있는데, 그것은 나무이면 서 동시에 사슴뿔을 표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진출처=pixabay.com
나무와 사슴은 모두 샤머니즘과 관련이 있는 고대인의 신앙에서 솟아난상징인데, 샤먼(무당)과 내 무의식 속의 어떤 심상이 서로 화답하고 있다는 뜻일까 생각해 보면, 예술치료를 처음 공부하는 초심자의 마음이 고대의 치료사적 상징을 내면에서 불러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곁에 두고 자주 읽는 시집이 한 권 있는데, 마종기 시인의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라는 시집이다. 여기에 「날아다니는 사슴」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어두운 세상에 날개를 달아 주는 느낌을 받았다.
사자에게 쫓기다가 다리 물리고
눈을 뜬 채 통째로 뜯어 먹히는
사슴의 아픈 눈을 TV로 보다가
사슴의 죽은 눈을 감겨주다가
잠이 오지 않는 날은 밤이 환하고,
너른 평원에는 잔인한 짐승들 우짖고
사자에게 쫓기던 사슴 한 마리가
갑자기 머리 치켜들고 날아오른다.
사슴 한 식구가 공중에 날아오른다.
날아라 사슴, 눈부신 가벼움.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죽인다는
사나운 세상의 공식을 넘어서 살아라.
날아가 버려라, 오늘날의 사슴아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 땅에도
고운 꽃 피는 이유를 왜 모르겠느냐,
날아다니는 사슴의 눈물 고인 길 따라
나는 너무 먼 곳을 돌아왔을 뿐이다.
눈에 보이게 안 보이게 약육강식의 피비린내를 풍기는 세상에서, 마종기는 사슴을 옹호한다. 초식동물인 사슴이 육식동물인 맹수에게 쫓기고 물려 죽는 비정한 지상에서, 사슴의 눈물이 고인 길을 따라 살라고 말한다. 이윽고 마침내 그 사슴은 눈부신 가벼움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눈물겨운 세상에 고운 꽃 한 송이 피울 것이다.
카렌 암스트롱. 영국의 종교학자였던 이 여성이 쓴 책이 한 권 있다.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라는 책인데, 고타마 싯다르타의 삶을 통하여 한 인간이 어떻게 진리에 접근해 가는지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중에 마음에 특별히 와 닿는 부분이 있다.
사진출처=pixabay.com
전설에 따르면, 고타마는 아버지의 궁전에서 괴로움을 모르고 살도록 강요받았는데, 우연한 기회에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고타마를 데리고 이듬해의 작물을 심기 전에 밭을 가는 의식에 참가한 적이 있다. 아버지 슈도다나는 어린 아들을 유모들에게 맡겼는데, 유모들은 아이를 개복숭아 나무 그늘에 혼자 남겨두고 쟁기질을 구경하러 갔다. 이때에 혼자서 일어나 앉은 고타마는 들판에서 쟁기질하는 것을 보다가 어린 풀이 뽑혀 나가고, 거기에 달라붙어 있던 벌레와 알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린 고타마는 이 살생을 보고 묘한 슬픔을 느꼈다. 마치 자신의 동족이 죽음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린 고타마는 자신과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생물들의 고통이 가슴을 꿰뚫었을 때, 자연발생적인 동정심이 생겨나면서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순간적으로 영적 해방을 맛보았다 는 것이다.
고타마는 나중에 출가한 뒤로 가혹한 금욕 수행을 통해서도 얻지 못했던 비결을 어릴 적 경험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깨달았다. 그 비결은 먼저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은둔’이라 고 불렀던 것인데, 고요한 가운데 혼자 있으며 명상에 잠기는 것이다. 만일 어린 시절 유모들이 곁에 남아서 수다를 떨며 그의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면 그는 쟁기질에 의해 죽어가는 목숨들의 고통을 듣지도 보지도 못했을 것이고, 연민을 느낄 겨를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 전우익 선생이 말씀하시길, 고요한 산에서 고함쳐 고요를 깨트리는 자들과 하얗게 쌓인 눈밭을 마구 짓밟아 난장판을 만드는 사람들은 미치광이라고 했다. 거창 가조에 있는 저수지를 가 보니, 어마 어마한 물이 꽉 차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란 그 만만분의 일만 모여도 야단법석을 떨었을 텐데 물은 정말 대단하구나 싶었단다. 전우익 선생이 말한 ‘적막한 아름다움’을 함께 지켜볼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게 사람의 현실이다.
“아름다운 건 모두 사라지고 징그러움만 끈질기게 살아남아 판을 치는 것 같아요. 떠들썩함에 길든 현대인은 적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한없 이 떠들고 지껄입니다.”(<사람이 뭔데>, 현암사) 파도가 일렁이는 물결 위 에선 제 얼굴이 온전히 비추어질 리 없다. 사람들은 제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쉴 새 없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자진해서 떠들썩한 분위기를 찾는다.
한편 고타마는 은둔 상태뿐 아니라 벌레와 어린 풀 때문에 슬퍼했던 그 동정심으로 가득한 사욕 없이 유익한 마음 상태를 키우고, 동시에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마음 상태를 세심하게 피해 나가라고 하였다. 이 당시 수행자들은 폭력, 거짓말, 도둑질, 음주, 성교의 다섯 가지를 무익한 행동으로 여겨 금하였는데, 고타마는 이 다섯 가지 금지에 반대되는 긍정적인 태도를 이끌어내라고 말한다.
수행자는 단지 폭력을 피하는데 그치지 말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행동해야 한다. 나쁜 의지를 가진 감정들이 조금이라도 싹트는 것을 막기 위해 자비에 대한 생각을 키워가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올바른 말’을 하고,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도둑질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이든 기꺼이 주는 것에 기뻐하고 개인적인 선호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이렇게 긍정적인 마음의 상태를 의도적으로 계발한다면, 이런 능숙한 행동이 습관으로 바뀌어 제2의 본성이 되고, 수행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순수한 가쁨을 느낄 것으로 고타마는 믿었다.
카렌 암스트롱
자기중심주의와 아집에서 벗어나, 비록 현실 속에서 고통 가운데 거닐면서도 “내가 고통 받는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이 고통 받는다”라고 말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은 뒤에, 고타마가 찾아가서 대중들에게 처음 설법을 하였던 곳은 녹야원(鹿野苑)이었다. 사슴공원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부처와 대중이 만나는 장소였다.
부처는 병든 세상과 인간을 치유하는 큰 사슴이었고, 대중은 미처 완쾌되지 못한 작은 사슴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부처이든 대중이든 모두가 본래 사슴이라는 점에선 다를 바 없다. 한 전설에선 고타마가 어머니의 심장 높이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이것은 심장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만, 즉 다른 사람들의 괴로움을 마치 자신의 괴로움처럼 느낄 때에만 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이렇게 말한다. “짐승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반면, 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것을 덜어 주려 한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부처가 된 고타마 역시 다른 짐승을 해치지 않고 풀을 뜯는 사슴처럼, 그 사슴의 선한 눈매를 가졌을 것이다. 그들 영적 스승들은 ‘사나운 세상의 공식을 넘어서’ 살았다. 아픈 눈에 눈물을 담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며, 자기연민으로 몸부림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파하는 가운데 참된 자기를 발견하였다. 그런 방식으로 자기 몸의 무게를 덜어내고 가볍게 날아 올랐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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