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그리고 시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모든 2 2015. 11. 20. 06:17

 

 

 

 그 깃발,서럽게 펄럭이는/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 있네.하얀 빤스 한장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 없는 바람은 창문을 마구 흔들고 가네,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

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소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마구 펼쳐놓는데

내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그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

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사곶 해안/박정대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

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

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

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生의 밑바닥

이곳에서 횡행(橫行)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

내가 안으로,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

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

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

이렇게 마치 한 생애를 다해 걸어가야 할

광대한 고독 같다. 누군가 바람 속에서

촛불을 들고 걸어가던 막막한 생애 같다

그대여,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도

그 뒤에 남는 건 오히려 부드럽고 견고한 生

백령도,백년 동안의 고독도

규조토 해안 이곳에선

흰 날개를 달고 초저녁별들 속으로 이륙하리니

이곳에서 그대는 그대 마음의 문지방을 넘어 서는

또 다른, 生의 긴 활주로 하나를 갖게 되리라

 

 

 

하얀 돛배/박정대

 

창밖엔 눈이 내렸네,하루 종일 눈이 내렸네,

어디에서 부턴가 눈물의 경계를 지난 눈들의 육체,

영혼도 나무들을 떠나는 이 시각에 저 눈들은 다 뭐란 말인가,

물방울이 되지 못한,눈물이 되지 못한 딱딱한 눈들이 쳐들어오는 동안,

산골짜기에서는 어린 나뭇가지들이 뚝뚝 부러졌네,

산짐승들 굴 속에서 폭설이 멎길 기다렸네,나는,

가스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 놓고 또다시 물이 끓기를 기다렸네,

눈이 내렸네,주전자 속에서 폭풍우가 치고 하루 종일 마음이 고요하게

들끓는 동안,눈은 진눈깨비가 되어 퍼붓다가,멎고,하면서

집요하게 애인처럼 내렸네,이미 초토화된 내 추억의 삶의 공터 위로..

하루 종일 하얀 돛배가

 

 

 

 

그대의 발명/박정대

 

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

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

 

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

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

 

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

 

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

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앵두꽃을 찾아서/박정대

 

앵두꽃을 보러 나,바다에 갔었네.

바다는 앵두꽃을 닮은 몇 척의 흰 돛단배를 보여주고는

서둘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으므로 나,

사라져 가는 것들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후회처럼

소주 몇 잔을 들이켰네 소주이거나 항주이거나 나,

편지처럼 그리워져 몇 개의 강을 건너 앵두꽃을 찾아 산으로 갔으나

산은 또한 나뭇잎들의 시퍼런 고독을 보여주고는

이파리에 듣는 빗방울들의 서늘한 비가를 들려주었네

남악에서 들려오는 비가를 나,

또 다시 앵두꽃이 피는 항산을 찾아 떠났으나 내 발걸음 비장했음은,

내 마음속으로 이미 떨어져 휘날리는 꽃잎의 숫자 많았음에랴 그리고 나,

문지방에 앉아 문득문득 행두꽃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보지 않은 이 세상의 가장 후미진 아름다운 구석을 떠올리겠지만

앵두꽃을 보기에 그대만한 장소가 이 세상 또 어디에 있으랴 이제사 고요히 철들어 나,

앵두꽃을 보러 그대에게로 가노니,하늘 아래 새로운 사실은 없고 그 사실 앞에서

앵두꽃이 피지 않는 곳 또한 없음에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