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고 싶다

연민, 조금은 연약해 보이는 사랑으로

모든 2 2020. 7. 4. 09:52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2

 

시골에 살다 보니 거울을 쳐다볼 일이 별로 없다. 무주는 ‘청정지역’이라더니 공기가 하도 맑아 나를 빼곤 모두가 투명하다. 쨍하게 푸른 겨울 하늘을 보거나, 눈을 부시게 만드는 눈밭을 걷거나, 새끼 꿩들이 뒤뚱뒤뚱 푸르륵 지나가거나, 처마에 눈 녹은 물이 점점이 떨어지는 광경이 또렷하다. 어느 날 문득 눈이 침침해져서 한참을 갸웃거리다 생각한다. 아참, 안경알을 닦으니 금새 세상이 밝아진다. 그렇게 모든 맑은 것은 내 밖에 있고, 모든 침침한 구석은 내 안에 내 곁에 있음을 깨닫고는 순간 발끝을 오므려 본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기가 망설여진다.

문득 거울 본 지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집에도 거울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마루에 반원형 거울이 있기는 하지만, 다만 그 앞에 앉아 있을 기회가, 아니 필요가 적을 뿐이다. 농번기의 바쁜 일상 뿐 아니라 농한기의 한가한 겨를에도 내 얼굴을 그저 번듯하게 보여 줄 데가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잊고 산다.

 

윤동주 시인은 「참회록」이란 시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고 썼는데, 그분은 거울을 통하여 자기 안의 풍경마저 비춰 보았던 모양이다. 거울 보기가 부끄러웠던 윤동주는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으려 한다. 그런데 윤동주는 왜 하필 손바닥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으려 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아마도 걸레라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몸으로 마음을 닦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더러워진 마음은 그저 제 몸을 부려 행동함으로써, 제 생활을 바닥부터 하나씩 구체적으로 바꾸어 감으로써 맑아진다고 여긴 탓이겠지. 윤동주는 말한다. 그렇게 거울을 닦고 나면, “어느 운석 밑으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나타난다”고. 그는 맑은 거울에 드러난 자신을 ‘슬픈 사람’이라고 이름 붙였다.

거울이 몸을 비추어 준다면, 정작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은 사람의 ‘눈’이겠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거울이 아니라도 만사를 통하여 자신을 투명하게 보겠지. 사람의 지체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서 세상과 인간을 흐림 없이 볼 수 있겠지. 미간이 넓은 사람일수록 두 눈을 통하여 세상을 구석구석 낱낱이 놓치지 않고 보겠지. 윤동주는 그 눈을 통하여 ‘슬픔’을 보고, ‘사람’을 본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본다. 그리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 모습 역시 발견한다.

강인한 사랑보다는 지켜보는 지긋한 눈길로

아이가 밖에서 친구들과 다투고 속상해서 울며불며 돌아온 날, 눈물이 퀭하게 고인 아이의 눈망울을 들여다본다. 그 눈동자 속에 한 사나이가 들어앉아 있다. 내가 말을 하면 그 사나이도 뭔가 이야기하는 듯 하다. 내가 웃으면 그 사나이도 따라서 웃고, 내가 멀어지면 그 사람은 점점 작아진다. 미운 사람들은 서로 등을 돌려 앉는다고 한다. 불편한 사람에겐 눈을 돌리고, 편안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우리는 눈을 맞춘다. 사랑하는 이의 눈을 보고 있자면, 그 눈 속에 첨벙 빠져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이의 눈동자 가득히 내 얼굴을 담고, 내 눈 속에 그이를 온전히 채워두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눈은 특별한 것이고, 어떤 ‘관계’를 말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충혈된 눈은 ‘미친 사랑’이다. 그 안에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눈매로 품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가두고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사랑이다. 사랑이 자유를 주지 못할 때, 그 사람은 내 눈 속에 맑은 모습 그대로 맺혀 있지 못한다. 정말로 사랑하는 이들은 충혈된 눈을 풀어주게 마련이다. 절망하고 슬픔에 젖어 있는 붉은 눈망울을 가라앉히고 맑은 눈물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고 품어 준다.

열정이 지나치면 원망이 생기고, 원망을 삭이지 못하면 상대방을 파괴하고 결국 자신도 파괴하는 걸 우리는 많이 봐왔다. 그래서 조금은 연약해 보이는 사랑이 필요한 법이다. “내가 널 지켜 줄게” 하는 강인한 사랑보다는 지켜보는 지긋한 눈길과 자상하게 돌보는 마음이 더 소중한 시절이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사랑 때문에’ 남을 다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명분이 과정을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랑이 ‘연민’이다. 마땅히 슬퍼할 것을 더불어 슬퍼하는 마음이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윤동주는 과연 어떤 눈을 가졌기에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이 시의 제목은 놀랍게도 ‘팔복(八福)’이다. 일제 강점기를 정말 복 받고 살지 못한, 결국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생체실험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윤동주는 슬픈 사람이었기에 정말 복된 사람이었던가. 그 슬픔의 사람이 남긴 시편이기에, 예사롭지 않은 진동을 느낀다. 그가 흘렸을 맑은 눈물에 몸을 씻고 싶다. 그러면 나도 좀 맑아지고 유순해지고, 정 깊고 슬픈 족속에 입적(入籍)될 수 있을까.

심안(心眼)이든 육안(肉眼)이든 눈의 몫은 먼저 ‘보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눈으로 무엇을 보느냐’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눈이란 ‘나’라는 세계와 ‘너’라는 세계가 소통하는 창(窓)문이기 때문에 사물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곧장 만사 가운데 특별한 물건에 주목하게 된다. 내 눈매가 젖어 있으면 비 맞은 나뭇잎과 일상의 무게를 버거워하는 이들의 처진 어깨를 보게 된다. 내 눈매가 날카로우면 사뭇 먹이가 될 만한 것을 찾아서 눈동자를 옮기고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유독 윤동주의 시선을 들먹이는 것은 세상의 모든 가엾은 목숨들을 아끼는 까닭이다.

사실 제대로 ‘본다(seeing)’는 것은 ‘안다’는 것이고,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말이다. 성서에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제 마음을 실어 보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것은, 본 것 때문에 제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걸 보는 바람에 제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내 눈동자 속에 이미 들어와 버린 것들이 내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사진출처=pixabay.com

 

주인의 마음의 행방을 따라가는 눈

예전에 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우린 또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몇 해 전에 큰 물난리가 나서 마을 앞 다리가 끊어진 적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다리 공사를 하면서 한 주일 동안 잡역부로 일한 적이 있다. 철근을 나르다 보면, 빨갛게 코팅된 목장갑이 하루에 한 켤레씩 닳아서 없어지곤 했다. 낡은 목장갑은 늘 고단한 나의 노동을 기억하게 만들고, 밭에서 삽질을 하거나 호미를 들고 있는 자의 노고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노동이 소중한 나의 일부임을 깨닫게 하기에, 모든 수고하는 자와 어떤 연대성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노랑색 비옷을 입고서 물꼬를 보러 가는 촌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작업장 안에서 일하는 건강한 노동자들, 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화물차 창턱을 괴고 앉은 운전기사, 보도블록을 깔고 있는 노무자들, 주방에서 그릇을 닦고 있는 식당 아주머니들에게 눈길이 가면서 이들이 ‘내 형제요, 자매’라고 내내 마음에 새기게 된다.

눈은 주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용케 눈치채고, 주인의 마음이 닿을 만한 사물을 읽어낼 줄 안다. 어느새 나의 시선은 나뭇가지에 날아든 작은 새에게 맞추어져 있고, 토란 잎 위에 일렁이는 물방울을 향해 있다. 그 빛나는 순수. 아침 햇살이 닿을 때마다 수정구슬 같은 물방울이 반짝인다. 아름답다.

그렇게 내 눈빛은 내가 세상에 대하여 절망할 때마다 다시 한 번 아름답게 희망을 걸도록 아침마다 새벽마다 부추기고 힘을 준다. 초록의 잎사귀들은 제 몸에 새긴 나무를 보여주며 전체는 부분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내 눈이 밝아져 우주로 열릴 때까지 내 눈은 날마다 새로운 계시를 내려 주겠지. 가장 작은 것을 통하여 가장 큰 것의 세계로 나를 초대하겠지. 미물을 보살펴 세상을 아끼게 하겠지. 눈이 무엇인가 볼 수 있는 것은 빛의 작용일 텐데, 눈은 그래서 빛의 속도로 빠르게 세상의 이치를 알게 해준다. 물론 작은 것부터, 하찮은 것부터, 어린아이로부터.

볼 눈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세계

시골에 와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농사와 집짓기다. 특히 목수 일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눈썰미로 배워야 한다. 생활에 요긴하고 관심이 있으면 보여야 할 것이 보이는 법이다. 특히 목수들이 연장을 다루고, 아귀를 맞추는 것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도움이 된다. 아무리 요령이 단순해도 본적이 없으면 애를 먹게 마련이다. 그래서 처음 귀농했을 때는 남들 일하는 것을 그저 보고 또 보고,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부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의 눈이 어디로 열리게 될지. 그걸 보고 나는 또 무슨 생각에 잠기게 될지 궁금해진다. 봄날 깊은 숲에서 뜻밖에 고사리 밭을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처럼, 그렇게 내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 줄 어떤 ‘볼 것’을 기대한다. 예수는 진리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찬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지. “와서 보라!” 물론 볼 눈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세계이겠지만 말이다.

내 눈이 거울이다. 세상은 내 눈에 비친 모습으로만 ‘나에게’ 존재한다. 맑은 눈이라면 세상을 투명하게 보겠지. 자비로운 눈으로 보면 세상은 연민으로 가득 차 있겠지. 세상을 공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 보게 되는 날을 스스로 기다린다. 그래서 오므렸던 발끝을 다시 펴고 떳떳한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말이다. 세상의 모든 슬픈 눈들이 더 이상 슬프지 않게. 자기를 연민하던 눈길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자매 형제적 연대감을 느낄 때까지. 그래서 사람의 눈을 도무지 피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까지.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