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3
어린 시절엔 집집이 돌아다니며 시주를 청하는 탁발승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어느덧 시류(時流)에 밀려나 사라진 것 같다. 언젠가 서울 나들이길에, 충무로 전철역 4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다가 칠순은 됨직한 탁발승을 보았다.
불전함 옆에 잡동사니를 담은 듯한 비닐백이 놓여 있었고, 흰 운동화 차림의 스님은 신문지를 여러 겹 접어서 방석 대신으로 절을 할 때 무릎과 팔꿈치에 괴었다. 전철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지하 플랫폼에 울리는 목탁소리를 들었다. 스님은 한차례 승객들이 몰려간 뒤엔 잠시 신문지를 깔고 앉아 포개놓은 발 옆에 목탁을 내려놓고 숨을 돌리면서 천장에 무심한 눈빛을 던지곤 했다.
잠시 후 또 한차례 승객들이 계단을 우르르 내려올 기세가 보이고 스님은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그저 불특정 다수를 위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행복을 빌어주며 목탁을 두드리고 돌바닥에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사람들이 부처라는 뜻일까?
제 밥벌이를 하느라 안달하는 사람들, 생존경쟁에서 밀려나 피곤하고 지친 사람들, 물 만난 고기처럼 파드득거리며 배낭을 메고 여행 떠나는 사람, 그 무더운 날에도 양복을 단정히 입고 넥타이를 매고 머리카락은 무스를 발라 올려붙인 채 007가방을 든 청년, 한 아이는 등에 업고 한 녀석은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엔 종이백이며 검정비닐 봉지까지 여럿 쥐고 걷는 아녀자들, 칼칼해 보이는 노인네나 야시시한 처녀들이나 철모르는 아이들에게도 따지고 보면 모두 속엔 부처가 들어앉았다는 것일까?
그러나 한떼의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동안 불전함에 돈 한푼 넣는 사람이 없었다. 산다는 게 전쟁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지하철이라서 그런가, 마음이 있어도 가던 길 멈추고 스님을 돌아볼 여유를 가진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했다. 다만 나중에야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오던 노인네들과 몇몇 아이들이 불전함에 돈을 집어넣었다.
사는 게 바쁘다 보면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기에 그토록 치열한 삶에 몸을 던지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일단 ‘살고’ 보는 게 상책인 셈인데, 이제 서둘러 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고 믿어지는 뒤처진 인생들만이 정작 살아 있다. 아님 생존경쟁이 얼마간 유보되어 있는 아이들에게만 남을 돌아볼 거룩한 과업이 남겨진 것일까?
모두가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지만 그 불성이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게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러나 스님은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은 생애의 가장 밑바닥에서 들어올리는 목탁소리를 선남선녀들에게 그저 담백하게 들려줄 뿐이다. 그 소리에 깜박 놓았던 정신(본성)을 되찾는 사람이나 무심결에 그마저 흘려버리는 사람이나 결국 제 몫의 업(業)대로 사는 것이다.
스님의 무심한 표정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갖는 것은 내가 그만큼 부족한 탓이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 조바심치지 않고 은근하게 나를 기다려 주는 어떤 시선이 있다는 것이 나에게 심호흡 한 번 더 하고 새롭게 걸어갈 용기를 준다. 하느님이 빛이라면 그 빛이 지나는 통로가 되어 보기로 작심할 시간을 조금 더 얻은 듯하다.
생애의 바닥에서 청하는 탁발
탁발(托鉢)이란 생애의 바닥을 경험한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제 먹을 것을 구걸한다는 점에서 비굴하게 보일지라도 구걸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는다면 참으로 장엄한 것이 된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만나고 싶어 목이 빠지게 기다려지는 사람도 있고, 먼발치에서 보이기만 해도 발길을 돌리고픈 사람도 있다. 허나, 수행자에게 탁발이란 생존의 문제이므로 보기 싫은 것도 보고, 꺼림칙한 사람도 만나야 하며, 숱한 사람들의 호기심에도 의연해야 한다.
탁발승은 구걸하는 약자의 처지에서 세상과 마주서 있기 때문에 체면이나 위선을 벗을 수 있으며, 사람의 다양한 속내를 들여다볼 기회를 얻게 된다. 탁발을 하노라면 더러운 꼴을 당하고 관세음보살 같은 사람도 만나게 될 텐데, 단 몇 푼에 벌벌 떨면서도 행세깨나 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고, 없는 살림에 잔돈마저 탁 털어서 시주하고 싱긋 웃으며 가는 얼굴도 있을 것이다. 낮은 자의 처지에서 봐야 사물의 참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마련이고, 천하만물을 올려다봐야 천하만물의 바닥까지 보이는 법이다. 바닥에 엎드려 흙 묻히고 사는 모든 중생을 위해 발원하고 발원하며 목탁을 두드리는 이의 마음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형제인 해와 자매인 달’이라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그린 영화에서도 탁발 수도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추수 때는 들에 나가서 농부들을 돕고 그들이 나눠주는 빵 한 조각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기뻐하는 이들, 비가 엄청나게 퍼붓는 거리에서 그 비 온통 맞으면서 노래부르고 복음을 읽어주며 음식을 청하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
탁발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항상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절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경험을 누리게 한다. 우리 모두가 서로 기대어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타인이 착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우린 곧 질식하거나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해·달·별·바람과 비와 미물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린 한 톨의 곡식도 얻을 수 없다. 급기야 하느님이 우리의 배경이 되어주시지 않으면 우린 잠시라도 목숨을 이어갈 수 없다. 우린 살아있음만으로도 넘치는 은총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으면 나는 죽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게 탁발이다.
사륜구동 코란도를 몰고 절 입구까지 나 있는 아스팔트길을 달려 산사로 진입하는 스님을 보기란 요즘 그리 어렵지 않다. 빳빳하게 길을 들인 모시적삼에 감추어진 몸매를 설렁거리며 하늘 같은 밀짚모자를 쓰고 선방을 오가는 비구·비구니들의 모습이 환하고 깨끗해서 좋은데, 뒤끝이 그리 개운하지는 않다. 저렇게 수행해서 부처가 된들, 지지리 못난 중생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충무로역에서 만난 그 노스님의 조금은 뻥 뚫린 듯한 눈매에서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모시적삼 입고 코란도 몰고 다니면서 탁발을 좋아할 스님이 있을까? 실바람 살강거리는 방그늘에 앉아서 오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며 알 듯 모를 듯한 선문답을 하며 뒷돈을 챙기는 동안 수행자는 없고 종교가만 남는다.
마찬가지로 후원회란 조직을 통해 돈 모아 건물 짓고 우아한 언행으로 피정 지도하는 수도자 역시 대중의 피눈물을 몸소 겪고 그 발치에 엎드려 자비를 청할 용기가 없는 한 영성은 물 건너가고, 대중의 영은 구원할지언정 몸은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다. ‘흩어지는 교회’라는 교회론이 나온 지 한참 되었지만, 세상의 간난신고 속으로 파란만장함 속으로 강생하지 못하는 신앙은 어제나 오늘이나 ‘그들만의 천국’을 꾀할 뿐이다.
당장에 수행자든 수도자든 만사 접어두고 구걸하러 다니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만 가난을 이야기하는 편안한 길에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도 가난을 체험할 기회를 포착함으로써 부유한 은인들뿐 아니라 궁핍한 죄인들에게도 구원의 빗장을 열어줄 뜻이 없는지 묻고 있을 뿐이다.
[묵상]
그늘 속에서, 훨씬 환하게 빛나는
사라지는 것은 여백을 남긴다고
말한 시인이 있다.
쓸모 없음이 요긴할 때가 있다고
말한 철인이 있다.
버려진 사람이 인간의 마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만 흐르고,
아침마다 안개 자욱한 강둑을 바라보는
눈길이 있다.
그 안개 사이로 문득 반짝이는 것들이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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