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내 편이 아니던가요
상지종 신부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하고 졸랐다."(루카 18,1-8)
우스갯소리로 '남편은 항상 남의 편을 들어서 남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이예요, 남의 편을 들기에 남편이라고 할까요,아니면 남편이라고 부르니까 남의 편을 드는 것일까요. '남편'을 '내편'이라고 부르면 남이 아니라 내 편을 들지 않을까요, 그런데 말이지요, 남편은 내 편을 들어야 할까요,남의 편을 들어야 할까요. 내 편도 아니고 남의 편도 아니라,올바른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그러니 "남편'이니 '내편'이니 뭐라 부르든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남편이 언제나 올바른 편을 들도록 바라면 되고, 남편이 내 편이 될 수있도록 내가 올바르면 되니까요.
하느님은 누구 편일까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언젠가 어떻게든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니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면 된다는 희망적인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기도할까요? 예수님의 비유를 왜곡하면,기도를 자칫 이기심과 탐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비유 속으로 들어가서 찬찬히 살펴볼까요.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오늘 비유의 핵심은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에 있지 않고, '올바른 것을 청하여라.'라는데 있습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마저 거절할 수 없도록 줄곧 청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요.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이오."그렇지요,바로 올바른 판결입니다. 과부는 결코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고 조르지 않습니다. 올바른 판결,곧 자신이 옳다면 자신의 편을 들어주고, 자신의 적대자가 옳다면 적대자의 편을 들어달라고 청하는 것이지요.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끈질긴 청에 어떻게 응답합니까?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맞습니다. 바로 올바른 판결입니다. 과부와 그의 적대자 가운데 누가 올바른 비유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과부는 올바른 판결을 줄기차게 청했고, 불의한 재판관마저 올바른 판결을 합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이지요.
참된 기도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결론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올바른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무조건 내 편을 들어달라는 것은 참된 기도가 아니지요. 만약 하느님께서 내 편을 들어주셨다면,그분이 보시기에 내가 올바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참된 기도이기에, 하느님께서는 이 기도를 결코 물리치지 않으시고 기꺼이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예수님의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올바른 판결'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함께 열심히 기도해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이 곧 하느님께서 내 편이 되어주시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의롭게 가꾸면서 말이지요. 오늘 비유를 묵상하면서 짧은 글 하나 나누겠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리소서>
의로우신 하느님,
제가 의롭다면
더욱 의롭게 하시고
제가 불의하다면
가차 없이 내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의로우심을
저를 통해 드러내소서.
깨끗하신 하느님,
제가 깨끗하다면
더욱 깨끗하게 하시고
제가 더럽다면
가차 없이 쓸어내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깨끗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자비하신 하느님,
제가 자비롭다면
더욱 자비롭게 하시고
제가 매몰차다면
가차 없이 물리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자비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온유하신 하느님,
제가 온유하다면
더욱 온유하게 하시고
제가 거칠다면
가차 없이 꺾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온유하심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살리시는 하느님,
제가 살린다면
제가 더욱 살리게 하시고
제가 죽인다면
가차 없이 저를 죽이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살리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함께하시는 하느님,
제가 예,하며 따른다면
더욱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제가 아니오, 하고 거부하다면
가차 없이 저를 팽개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함께 하시는 분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당신처럼 되라 하시는 하느님,
제가 당신을 닮는다면
더욱 믿고 바라고 사랑해주시고
제가 당신을 지운다면
가차 없이 저를 버리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모든 것임을
저를 통해서 드러내소서.
<하느님께 청하지 마십시오>
더러운 재물과 썩은 권력을
하느님께 청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한다 해도
언제나 내어주시고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으니까요.
혹여 어쩌다가 잠시
더러운 재물로 배를 채우고
썩은 권력을 누린다 해도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마십시오.
비겁한 옷음 띤 감사의 기도가
자비와 정의의 하느님께 대한
용서받지 못할 극도의 모독이요
돈과 힘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신을 향한 우상숭배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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