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공장에서 만난 하느님,우정 안에서

모든 2 2019. 7. 3. 20:34



Book Review



공장에서 만난 하느님,우정 안에서


<공장노동자로 살다간 한 사제의 우정일기>,에지드 반 브루크호벤,에셈북스,2015


  1967년 12월 28일, 예수회의 젊은 노동사제 에지드 반 브루크호벤 신부(Egide Van Broeckhoven.SJ. 1933-1967)가 브뤼셀의 한 금속공장에서 돌연 사망했다. 에지드 신부는 마지막 몇 달 동안 동료 인부인 G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이들이 맡은 작업은 이동식 경사로를 따라 운반되는 세로 6미터, 가로 1.5미터 되는 금속판을 풀어놓고, 기중기의 집게들을 늦추어 놓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날 갑자기 집게 하나가 금속판을 내려놓지 않고 작업을 멈추었다. 에지드 신부는 그 집게를 늦추려고 쌓여 있던 금속판에 부딪쳐 척추가 부러졌고, 그는 현장에서 바로 사망했다. 막 서른네 살이 된 때였다.

  노동사제는 직접 현장에서 노동하며 노동자로 살았던 가톨릭 사제들이다. 1920년대 프랑스어권인 벨기에와 프랑스의 공업지대에서 시작되어 사회와 교회에서 환영을 받았으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노동사제들이 공산주의에 허용적이라는 혐의를 받고 1954년 비오 12세 교종이 금지시켰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 가치를 다시 인정받았는데, 에지드 신부는 그 당시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활동했던 노동사제였다.


  공장에서 하는 수도생활


  에지드는 본래 관상가의 삶을 희망했다. 기도는 언제나 그를 기쁨으로 채워주었으며, 오랫동안 엄격한 관상생활을 요구하는 카르투시오회에 매력을 느꼈다. "그곳에는 내가 찾는 모든 것이 있기에 행복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에지드 카르투시오회와 예수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빈민지역과 공장지대에서 카르투시오의 영성을 살고자 결심했다.


  "주님, 당신을 만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습니다. 이 체험을 제가 매일의 삶에서 계속 하도록 도우소서. 가장 버림받고 가장 잊혀진 사람들 가운데서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생활을 희생하겠습니다."(1963.12.6.일기)



  관상과 실천을 동시에 살아내기로 마음먹으면서, 그는 "하느님 안에서 타인을 찾고, 타인 안에서 하느님을 찾을 것"을 다짐했다. 헤베를레 신학원 신학생들을 위한 정기간행물에 실린 글에서 에지드 신부는 '우리의 사도적 사랑은,그리스도를 위해서나 우리들을 위해서나 '시간 속에서' 느낄수 있는 현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참으로 타인들과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쳐 구체적이고 만져볼 수 있는 방법으로 타인들을 만나러 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에지드 신부는 사제나 신학생들이 '현장체험'식으로 몇 주간 노동실습 하는 것을 비판했다.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의 삶을 나누어 가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타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만 해서는 안 되며, 우리 자신이 이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 예수를 세상에 내려 보내실때, 가서 하늘나라 일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정보를 얻어오라고 세상에 실습을 보낸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구원의 메시지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이 그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게 에지드 신부의 생각이다.


  "노동현장의 길 잃은 이들에게로 가려면, 우리가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대변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삶 전체가 가난한 이들의 삶의 방식 및 관습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들처럼 살아야 하고, 그들처럼 가난한 집에서 살며, 그들처럼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이유이다.

  아버지의 집이 참으로 그들의 집임을 그들이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교회의 얼굴이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교회 안에서 사회의 상류층과 연결된 부분이 있고, 그것 자체가 노동자들이 교회에서 멀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친구 안에서 당신을 찾을 때


  에지드 신부는 1964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965년 8월 부터 1968년 12월에 사망할 때까지 2년여에 걸쳐 네 차례나 공장을 옮겨 다녀야 했다. 관리자들이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이랬다. "신부라고요? 당신이 입사할 때 거짓말을 했구먼,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여기 둘 수 없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공산주의자를 모르고 채용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에지드 신부는 즉시 해고되었다. 그때 에지드는 이렇게 일기에 썼다.


  "나를 해고한다고 당신들은 말한다. 내가 일을 못해서가 아니다. 내가 '사랑 때문에'사람들과 가까이 살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건 비극이다. 1,300명의 노동자들이 한 명의 사제와도 접촉할 수 없게 되다니, 어쨌든 공장에서는 그들을 못 만난다. 바깥에서는? 그렇다면 이 공장에서 문 밖으로 쫓겨난 이는 바로 주님이시다."


  에지드 신부는 다른 노동자들처럼 쉽게 해고되고, 여러 차례 사고로 손톱이 빠지고 발목이 골절되면서도 자신이 노동자였던 예수님처럼 구체적인 삶 안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데 기뻐했다. "그들처럼 가난하고, 그들처럼 일하며 살고, 그들처럼 모든 것이 막막하게 되는 것,복음의 언어로 말하자면, 세상의 권력가들 앞에 보잘것없고 가난한 이들이 되는 것"을 감사했다.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만나서 경험한 것은 삶의 바닥에서 나누는 '우정'이었다. 에지드 신부가 해고될 때마다 그들이 건네 준 말은 이러하다. '자네에게 고해성사를 보러 오겠네." "숙식문제가 곤란해지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언제든지 우리 집에 와서 지낼 수 있네."

  마지막 공장에서 함께 해고된 열다섯 살 노동자 미즈는 에지드에게 "우린 앞으로 친구예요."하며 악수했다. 그 아이와 함께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어느 날은 "아저씨 집에서.. 같이 살고 싶은데.."하였다. 에지드 신부는 그날 일기에 "주님,감사합니다. 집도 절도 없는 이 가엾은 어린 노동자의 우정에 감사드립니다."하고 썼다. 에지드 신부는 "지상이 아직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이 필요하다"면서 '오늘의 세상은 하느님의 현존으로 불타는 떨기나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구체적이며 복잡한 노동현장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마나러 오시는 거룩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정'이 발생한다.

  에지드는 "우정과 동료애는 다르다."면서, "우정은 친구를 찾되,하느님께 예속된 자로서 찾으며, 친구의 친밀함은 친밀함 자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내 친밀함 자체이신 하느님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내 친구는 영원한 하느님 사랑의 다정한 여명"이라고 말하는 에지드신부는 우리는 친구와 구체적인 우정을 경험함으로써, 하느님과 인간이 나누는 우정 안으로 진입한다고 설명한다. 그 모든 관계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성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소를 '우정의 깊은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 안에서 당신을 찾은 이후

당신 안에서 친구를 찾고자 하나이다.

친구의 친밀한 내면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당신의 친밀한 내면 안으로 들어가오며,

친구의 눈길을 이해하려 할 때

제 두 눈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쉽니다."(1960.1.31.일기)




왜 나는 공장에 일하러 갔는가?

에지드 반 브루크호벤 신부


  어떻게 내가 공장에 일하러 갈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더듬어 볼 때,무엇보다도 나를 사로잡는 것은 대도시에 산재해 있는 비그리스도교화 된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걸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벨런스 신부님의 영향과 지역 사도직의 경험을 통해, 복음적인 선택으로서 가난한 이들,보잘것없는 사람들에 대한 매력을 발견한 다음이었습니다.

  이러한 장소를 택하면서 나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결국 그 구석진 곳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명백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직의 시작과 끝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선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구원 역사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 안에서,현재의 구체적인 세계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만져볼 수 있는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와 이토록 멀어진 가난한 대중에게로 참으로 갈 수 있고,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 중 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스도는 가장 첫 번째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처럼 일하러 가고, 아무것도 헤아리지 않으며, 그들처럼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이 점을 알아듣게 된 것은 내가 해고 되었을 때, 가장 가난한 이들 중 하나인 BR이 내게 "에지드,자네가 곤란하게 될 때는 언제고 나한테 의지할 수 있다네. 자네가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와서 묵게나."라고 말해준 때였습니다. 그 당시 나는 그와 같은 수준에서 완전히 친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나는 수많은 그의 동료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들 중에 꼴지가 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그렇지 않고는,보잘것없는 이들은 영영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삶으로 밀어 넣어 준 또 다른 동기는 하느님께 대한 크나큰 갈망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오늘의 이 세상 현실 안에서,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우선적으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위적인 테두리 안에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구원되어야 할 이 세상에 계십니다. 그분은 확실히 그런 곳에 현존하시며, 우리가 베푸는 우정,특히 우리가 가서 함께 사는 그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받게 되는 우정안에 살고 계십니다.

  이 두 가지 동기 위에 삶 자체에서 생겨난 다른 동기들이 더해졌습니다. 이 동기들은 내게 삶에 대한 더 큰 애착을 갖게 해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에 대한 커다란 걱정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생겨났으나 그 많은 사제들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은 그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역설적인 상황을 볼 때 더 이상 편안히 잠들 수 없습니다. 교회가 사느냐 죽느냐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보잘것없는 이들을 통하여 복음화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복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되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아직도 선포되고 있지 않다면,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가 애착을 느끼는 두 번째 동기는 매우 구체적인 모든 측면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적 불의를 발견한 것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자본가들과 타협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사회적 약자들을 섬겨야 합니다.

  셋째로는 바로 이곳에서 사제의 삶이 지닌 어떤 측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착한 목자의 비유 같은 것입니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것이 바로 이 삶 안에서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한 현실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런 삶에 애착을 갖게된 이유를 덧붙입니다. 나는 아주 구체적으로 이 가난한 이들, 이 노동자들,이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로부터,그들의 목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고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나는 그들 가운데서 가장 가난한 이들,즉 이슬람 신자들과 그리스정교 신자들,곧 고향에서 뿌리 뽑혀진 사람들,특히 지난 주에 해고당한 아홉 명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친구들을 통하여 내가 가난한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그리스도교를 떠난 이들로 이루어진 민중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이 구체적이고도 전적인 우정이 때로는 힘겨우면서도,언제나 위안을 주는 단 하나의 진정한 길이며, 이 길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 세상에서 확장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사제가 되기로 했던 결정에 대해 재고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며, 이제 더 이상 허락될 수 도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1967년 4월 트롱시엔느 수도원 만남의 날 발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