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가난한 교회인가?
정일우 신부 S.J.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교회의 관심거리는 교회를 잘 유지시켜야 하는데 교회가 어떤 위험에 처하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보면 그 속에 복음적인 가치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이걸 보면 '교회'가 복음적이라면 가난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상식'입니다.
'예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교회'임을 얼마나 의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시는지요? 우리 교회를 보통 '홀리 로만 가톨릭 처치'(Holy Roman Catholic Church)라고 부릅니다. 거룩하고 보편된 로마의 교회라는 뜻입니다.
보편됨은 '가톨릭'이라는 뜻이고요. 그러나 사실 우리 교회는 '로마의 것'도 아니고, 교황님이나 주교님이나 성직자들의 것도 아니고, 백성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우두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모시고 모이는 단체입니다. 지금 교회가 이런 생각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우리 믿음의 첫째가는 대상은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신자들은 "천주교를 믿습니다. 교리를 믿습니다. 교회를 믿습니다."합니다.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런 믿음은 이차,삼차,사차,오차입니다. 우리 믿음의 일차적인 대상은 야훼도 아니고, 하느님도 아닙니다. 삼위일체도 아닙니다. 일차적인 대상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야훼나 하느님이나 삼위일체는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일차적인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얼마 전에 이병호 주교님이 저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신자들이 야훼를 믿는 건지, 예수님을 믿는 건지 어느 때는 불분명하다."고 그러셨어요.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구약과 신약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야훼를 믿기가 어떤 면에서는 훨씬 쉬워요. 왜냐하면 전통적인 의미의 야훼는 내용이 별로 없거든요. 애매하고 엄격한 그 존재 앞에서 굽실굽실하면서 '잘 봐주십시오'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 그렇거든요. 예수님은 너무너무 구체적입니다. 또 요구하시는 게 너무 많아요. 하여튼 우리의 첫째가는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뿐이란 걸 알아두셨으면 해요.
정일우 신부
예수를 믿는 것은 길(道)이기 때문입니다.
첫째가는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이라 할 때,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면부터 믿어야 하나요? 저는 '예수님이 우리의 하느님이다. 예수님께서 신성을 지니셨다'그런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고 메시아다. 예수님은 구세주다'이런 것도 첫 단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은 인격이요, 위격입니다. 우리 신앙의 일차적인 대상은 어떤 이념이나 개념,아이디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신학도 아니고,교리도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인격이요 '예수님'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이다'라는 것도 나중에 생각하면 됩니다. 우선 예수님이 바로 '길'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느님이라는 것도 믿어야 하지만,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믿는 게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천주교회 역사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전에 신자들을 '신도'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사는 사람들,이것이 맨 처음의 이름이었습니다. 새로운 도(道)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생명이다."무작정 예수님을 '하느님이다. 야훼다'하면 아주 추상적인 이야기가 되기 쉬워요.
이런 생각도 해보았어요. '천주교'랑 '천주교회'랑 어떻게 다른지 말입니다. '천주교'라는 말에는 '모임'이라는 뜻이 빠져 있어요. 저는 교회는 모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주교회는 예수님이 길인 것을 믿고 그 길을 걷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예수님은 애매한 개념 같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 걸어야 할 길이고, 그분이 길인 것을 믿고 그 길을 걷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천주교회'입니다.
그 길은 누군가 따라 걸어야 사실상 길이 됩니다. 그 길은 '하늘로 가는 길'이요, '참사람이 되게끔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참 종교가 어떤 것인지, 참 인간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고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 바로 참 인간이 되어가는 길이며 동시에 하느님께 가는 길입니다. 그분을 '길'로 생각하면 우리의 믿음이 추상적이지 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이 됩니다.
이 길의 핵심은 가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상대적인 가난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하셨지요. 저는 성탄절에 구유 앞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이 아주 가난하다는 데서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실 우리에게 예수님이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더 가난하면 좋겠다는 이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정말 사회의 찌꺼기,맨 밑바닥에 있는 제일 가난한 사람이었더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생각에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가난하셨지만,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요셉은 기술이 있었고 실업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인구조사 할 때 요셉과 마리아가 먼 길이었지만 베들레헴까지 갈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복음을 보면 매년 한번씩 올라갔다고 합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면 1~2주 걸리는 여행을 매년 하지는 못했겠지요. 하여튼 예수님은 문맹도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문맹이 흔했을 텐데, 예수님은 분명히 교육을 받고 글을 알고 쓸 줄 아셨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중산층은 아니더라도 아주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시지 않았다는 거죠.
광야에서 단식하실 때
절대적인 가난을 고의로 택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할 수 없이 당하는 가난과 자발적인 가난은 천지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내적으로 종교적으로 아주 충격적인 체험이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고서 예수님은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광야로 나갔습니다. 충격적인 체험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제 아버지로부터 내가 받은 사명이 좀 더 뚜렷해진 것 같은데 어떻게 실천해야 되느냐? 그래서 광야에서 예수님은 갈등도 고민도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당신 인생에서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거죠, 당신 사명이 우선 동포들,그 나라 모든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께 다시금 돌아가게 하는 것인데,이 사업은 민중과 함께 하는 거대한 사업이었습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세상 이치대로 이 세상의 힘을 빌어가지고 할 것인지 갈등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인 사회운동을 하려면 우선 돈이 필요하잖아요. 사무실도 필요하고,사람도 써야 하고, 게다가 굉장한 조직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을 어떻게 하면 성공시킬 수있을까? 고민한 거지요. 이 세상의 경제적인 힘,사회적인 힘,정치적인 힘,종교적인 힘을 빌려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냥 빈손으로, 맨발로,알몸으로 할 것인가? 즉 세상의 이치대로 할까, 하느님의 이치대로 할까 하는 고민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세상의 힘을 빌리지 않고 빈속으로,맨발로, 가난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되는 대로 사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이 세상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그러냐? 좋다!" 그러나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는데,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주 짧은 문장이지만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는 몇 마디 속에서 예수님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예수님은 부잣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초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얻어먹고 주무셨습니다. 초대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그냥 노천에서 주무시고,먹을 것이 생기면 먹고 없으면 굶습니다. 이런 가난이 그분에게 자유를 주었지요.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은 삶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가난을 택한 이유는 뭐든 문치 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자유'을 얻기 위해서겠지요.
예수님 별명 아시죠.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술고래와 먹보'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술을 너무 많이 먹고,잔치 집에 자주 가는 사람'으로 보여졌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의 집도 잘 가셨습니다. 그것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청빈'은 아주 딱딱한 무슨 이념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청빈허원을 한 사람은 '택시를 타면 절대로 안 됩니다.'라는 규칙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죽어도 택시를 안 탑니다. 그래야 청빈허원을 잘 지키는 줄 아는데 그것은 억지입니다. 탈 때도 있고, 안 탈 때도 있죠.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고, 안 탈 때도 있죠.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고, 가난하려고 한 사람이기 때문에 '절대 부자 집에 안 간다'는 그런 굳어진 마음이라면 '가난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념이고 벌써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념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아주 자유로웠습니다. 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난함도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은 물론
없는 사람도 나누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누라고 했습니다. 나누면 가난해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설교하실 때 사람들이 겁이 나서 말세가 되는 줄 알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급하게 물었습니다. "옷 두 벌이 있는 사람은 그중에 한 벌을 주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겉옷 달라고 하는 사람한테 속옷까지 주라."하셨습니다. 농담 같지만 나눔에서 세례자 요한이 50퍼센트라고 한다면,예수님은 100퍼센트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빵 기적을 행하실 때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먹을 것이 뭐가 있느냐,얼마나 있느냐?"하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먹기에도 많은 양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했겠습니까?" 우선 너희들이 먹을 것을 먼저 내 놓아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넉넉한 곳에서 조금씩 나누라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곳에서부터 나누라,부족한 곳에서부터 나누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부족한 곳으로부터 나누면 기적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는 유일한 조건으로
가난을 요구했습니다
복음서에 가끔 나오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싶다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건을 말씀하셨습니까? 대졸이냐,고졸이냐? 물어보지 않았죠. 족보와 가문과 출신지방 등 사회적 조건을 따지지 않으셨고, 심지어 사상도 종교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조건은 딱 하나였습니다. 내 제자가 되고 싶다면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주고 오라'는 거죠. 다른 조건은 없어요. 요즘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으면 다 팔고 돈을 '나에게'가져오라 했겠지만,예수님은 그 돈을 남에게 주고 그 다음에 나에게 '빈손으로'오라 하셨습니다.
유일한 조건이 빈손으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요구하셨습니다. 실제로 베드로, 안드레아,요한,야고보 등 제자들이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이건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여튼 이런 요구를 한 예수님도 대단하고, 그대로 한 제자들도 대단합니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도 이게 핵심이란 걸 잘 알았습니다. 물론 시간이 조금 지나서 많이 달라졌죠. 예수님이 요구한 것은 있는 것을 다 팔고 남에게 모두 주라 했는데, 교회에서는 남에게 안 주고 끼리끼리만 나누어 가졌기 때문입니다. 퇴보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가난과 나눔'이 복음의 핵심적 요청이라는 건 변함없습니다.
우리교회와 신앙생활의 핵심인
성체성사도 가난으로 초대합니다.
완전히 닫힌 교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이 세상이 악하고 험하니까 이 세상과 동떨어져 우리끼리 이 안에서 돌면서 우리끼리 기도하고 우리끼리 천당 가자. 이 세상과 가능한 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교회 밖으로 나가다가 다시 들어오는 교회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필요에 응답하긴 하지만 무조건 응하는 것이 아니라 무슨 선물 주듯 하고 다시 들어옵니다.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죠. 교회가 자선사업 할 때도 '교회에 나와라. 세례를 받아라.'합니다. 조건을 붙여서 뭔가를 합니다.
참된 교회는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완전히 무조건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게 '성체'입니다. 이게 성체성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을 들고 "내 몸이다, 먹어라!" 포도주를 들고 "내 피다. 마셔라!" 합니다. "나를 먹어라."는 엄청난 말인데도, 우리는 교회에서 너무 자주 듣는 말이기에 무심히 지나칩니다. 예수님이 "나를 먹어라"하고 말씀하신 것은,예수님이 이 사람,저 사람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네 안에 들어가 살고 싶다." 예수님은, 나는 하느님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나는 구세주고 너를 구해야 한다. 그러니 내 살을 먹어라. 내 피를 주는 거다. 이런 입장이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등이 좋아서, 너무 좋아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겁니다. 이게 진짜 사랑이지요. 이 사랑은 완전히 주는 것이고, 몽땅 주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주는 게 아니라 몽땅 주고서,조건도 달지 않아요.
'밥'을 생각해 봅시다. 밥이 있는데 그 밥을 먹으면 밥이 없어지죠. 이 밥이 완전히 내 것이 되죠. 내 안에 있는 밥이 나더러 이래라 저래라 합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완전히 우리에게 주셨는데 아무 조건없이 주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날 이렇게 쓰라, 아닙니다. 마음대로 쓰라고, 나는 이제 너희들의 것이니 나는 없어지고 너희들이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건 없이 주자는 게 '성체 성사'의 의미입니다. 조건 없이 나를 주고, 남의 밥이 되고,남에게 이용당할 때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사실 성직자 수도자라면 더더욱 언제나 이용당할 마음을 먹어야지요. 그리스도인은 '눈군가에게 이용당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잘 써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써먹도록 해야 합니다. 성체성사는 그런 것입니다. "나를 쓰라"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교회가 가난하지 않으면,교회는
이 세상의 부정,부패,불의에 참여하여 공범이 됩니다.
우리 신자들 안에도 부자들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럼 부자이기 때문에 악한가,나쁜 사람인가? 아니잖아요. 또 대부분 부자들이 이렇게 생각을 하죠. "나는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돈 벌었다. 또한 돈 벌어 오면서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거의 다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게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칩시다. 열심히 일하고, 나쁜 짓을 안하고서 부자가 됐다고 칩시다. 그런데 '제도'라는 게 있어요. 그들이 나쁜 짓을 안 했다하더라도 세계적인 경제 안에서는 악한 조건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래서 본인의 죄가 아니라도 그 악한, 안 좋은,불평등한,불의한 그 제도의 덕택을 봐서 돈을 많이 벌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노력만으로 따지고 보면 없는 사람들이 몇 수십 배 노력을 하죠. 간혹 노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나라 가난한 사람들은 너무나 부지런합니다. 굉장히 노력해요. 부자라면 불로소득(不勞所得)이 가능하지만 빈자라면 불로사득(不勞死得)입니다. 사실 부자들은 자본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일을 안 해도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땅 투기'하면 일하지 않고서도 엄청난 소득이 들어와요. 그러나 없는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죽습니다. 그래서 한 개인은 잘못한 일이 없더라도, 제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제자리입니다. 제도적인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밥 공기 열 개가 있고 사람도 열 명입니다. 고루고루 돌아가죠. 그런데 한 명이 강력한 사람이 되어서 나는 다섯 개를 먹겠다,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아홉 명이 다섯 개를 가지고 나눠 먹어야 해요.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지구의 자원과 물자는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제가 보기에 수학을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넉넉히 돌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인구가 너무 많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무지무지하게 돈이 많아요. 돌아가게끔 되어 있어요.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산을 잘못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잘 쓰면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런 꼴이에요. 지금 이 지구의 생산물 중에 80퍼센트를 이 지구 인구의 20퍼센트가 쓰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 인구 80퍼센트가 쓰고 있습니다. 한 나라를 봐서도 그렇고, 세계를 봐서도 그렇습니다. 자원이나 밥이 한정되어 있는데,그러면 고루고루 나누어 먹어야죠. 한정되어 있는데 한 사람이 너무 많이 가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만큼 못 갖죠. 아주 간단한 수학문제입니다.
교부들 말씀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꼭 필요한 이상의 무엇인가 소유하고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훔친 것이다."물론 알고서 훔친 것이 아니죠. 그런데 내가 필요한 이상 가지기 때문에 필요한 만큼 못 갖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이 많이 가졌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죄가 있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죄가 안 되느냐?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도가 어떻게 나쁜지 모르고,제도의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않고 그냥 단순히 내가 일하고 일한만큼 벌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죄가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사실은 가진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개인적으로 죄가 안 된다 해도 객관적으로 봐서 나쁜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사람들을 악인이라고 욕할 것이 아니라, 알게끔 해야죠.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랬죠. 복음서에 나오는 '부자와 나자로 이야기'를 아시잖아요. 그 부자는 나중에 어찌 될지 몰랐지만,우린 이제 알았으니,몰랐다고 발뺌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몰랐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힘을 빌어서
이 세상의 이치대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거 뻔한 얘기죠. 사람이란 돈이든 무엇이든 있다면 거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하죠. 돈이 많아지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많죠. 돈 있으면 권력도 살 수 있으니까요. 돈 자체가 힘이 되고, 그 힘을 쉽게 믿게 됩니다. 사실 필요한 것들이 다 주어지고,하고 싶은 만큼 다 할 수 있다면 '하느님 생각'이 언제 나겠어요. 이 세상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또 돈 있으면 내 것을 지키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먼저 지금 상태,지금 수준을 지키느라고 정신이 없고, 조금만 갖게 되면 더 갖고 싶듯이 돈도 재산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 늘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입니다. 또 재산이 많은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만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없는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게 됩니다.
전철을 타고 오면서 주교님,신부님들이 승용차를 모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승용차가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규칙입니다. 사목하면서 승용차가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전적으로 자동차를 반대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아셔야 합니다. 승용차 때문에 사목적 손해도 많이 본다는 것입니다. 보통 승용차는 혼자 타게 되지요. 예수님이 민중더러 "세상의 소금"이라 하셨는데, 승용차 타고 다니면서 언제 소금 맛을 보느냐는 겁니다. 제 얘기 오해하지 마세요. 승용차가 있다는 것, 몰고 가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급하지 않는 경우 대중버스나 전철을 타고서 이 나라 서민들과 비비는 것,부딪히는 것이 사목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말하는 것입니다.
아! 그만 해야죠. 그런데 제가 원고를 준비 할 때 컴퓨터를 쓰로 있는데, 한글 타자가 서툴러요. 그래서 한 번 쳐서 인쇄해서 봤는데, '교회'대신 '괴회'가 나왔어요.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말이 되네요. 왜냐하면 교회가 가난하지 않을 때 '괴회'입니다. 아주 이상한 모임이고,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 모임이 됩니다. 우리 대장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그럼 예수님을 모시고 모인 모임인데, 예수님이 핵심으로 가르친 '가난'을 무시해 버리고서는 '괴회'가 되고 맙니다.
요새 교회는 가난한 예수님을 잘 팔아서 어마어마한 돈을 법니다. 전철 안에서 예수님을 만병통치약으로 팔고, 대학입시 성공하는데 예수님 팔고요. 가난한 예수님을 선전하고 팔아서 얼마나 돈을 모으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신적이고 구복적인 것입니다. 추기경님! 제가 너무 과격하게 말씀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추기경님은 좀 기다리라고 하셨는데,이천 년을 기다려왔는데 더 기다릴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온 세계에서 성령께서 새롭게 움직이시는 것 같아요. 우선 우리 다같이 '교회가 가난해야 된다.'는 그 원칙만 조금 더 뚜렷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만 하면 더 기다려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자료제공 :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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