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돌아온 탕자,아버지가 되기
<돌아온 아들>,헨리 나웬,가톨릭일꾼,2019
우리 집안이 본래 머리숱이 많고 쉽게 백발이 되지 않는데,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부적 흰 머리가 늘어나면서,보잘 것 없는 인물이 더 어수선하다. 산발적으로 흰 머리카락이 솟아나는 바람에 스스로 보기에 정신 사납고,당분간 염색을 감당하기로 했다. 이참에 파커 J. 파머가<모든것의 가장자리에서-나이듦에 관한 일곱가지 프리즘>(글항아리,2018)에서 '나이듦은 특권"이라고 한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늙어서야 삶의 중심에서 예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는 안목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파리는 많아도,뿌리는 하나
거짓으로 보낸 젊은 시절 동안
햇빛 아래서 잎과 꽃들을 흔들어댔지
이제 나는 진실을 향해 시들어가네"
파머는 예이츠의 <세월과 함께 찾아오는 지혜>라는 시를 옮겨 적으며,'나이듦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 '거짓으로 보낸 젊은 시절'을 넘어 '진실을 향해 시들어'갈 기회가 열린다."고 했다. 헨리 나웬(Hemri Nouwin,1932-1996)이 노틀담과 예일대학,하버드대학을 모두 떠나 라르슈 공동체에서 장애인들과 살고,마침내<돌아온 탕자>라는 걸작을 쓴 것은 죽기 10년 전이었다. 렘브란트(Remvrandt Harmenszoon Rija,1606-1669)가 <돌아온 탕자> 그림을 그린 것은 생애의 마지막 해였다. 그들은 모두 대단한 명성을 떨친 학자였고 예술가였지만,생애가 저물 무렵에야 '정말'하느님을 만났고, 진실을 알아보면서 하느님 손에 목숨을 맡겨 드렸다. 그러니, 파머의 통찰은 아름다운 언어가 된다.
"나는 노화라는 중력에 맞서 싸우고 싶진 않아,그건 자연스러운 거니까. 난 최대한 협력하고 싶어. 저 일몰의 은총과 같은 무엇으로 생을 마감하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얼굴과 이마에 주름이 가득하긴 하지만,'늙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산 사람 중 한 명인 것만으로도 사랑스럽거든"(<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16쪽)
헨리 나웬,렘브란트를 만나다
헨리 나웬은 1983년 프랑스 트로슬리에 있는 라르슈 공동체에서 처음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포스터를 보고 감전되었다. '그림을 보았을 때 나의 가슴은 단번에 벅차올랐다. 내 자신을 소진시켜 버린 긴 여정 후,아버지와 아들의 부드러운 포옹은 그 순간 내가 갈망했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20세기 영성작가 나웬은 17세기 화가 렘브란트를 결정적인 시기에 운명적으로 만났다. 이후 1986년부터 딱 10년 동안 나웬은 토론토의 새벽공동체에 살며 그토록 갈망하던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다. 그것은 사랑에 대해 가르치는 교사에서 사랑받는 존재로 가는 여정이었다.
렘브란트,탕자의 귀환 The Retum of the Prodigal Son
작은 아들을 만나다
작은 아들은 <돌아온 탕자>비유에서, "아버지,재산 가운데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유산을 챙겨 먼 고장으로 떠났다. 케네스 베일리의 연구에 따르면,당시 자식들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아무런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작은 아들이 '자기 몫'을 요구하는 것은 '나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배은망덕한 아들은 "먼 고장'으로 떠나는데,이는 아버지의 '집'에서 거룩하게 여기는 모든 것과 단절되는 것을 뜻한다. 곧 나의 온 존재가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영적 실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집은'너는 사랑하는 이,내 마음에 드는 아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이다. 이 소리는 하느님이 첫 번째 아담에게 생명을 주었던 소리이며,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에게 세례 때 했던 말이다. 사랑받는 자는 거부의 두려움이나 남의 인정 없이도 남을 위로하고 가르치며 격려할 수있다. 복수하려는 마음없이 박해를 견딜 수 있으며,칭찬을 나의 선함의 증거로 삼지 않는다. 이미 주어진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고문당하고 죽을 수 있다. 그처럼 자유롭게 살며 타인에게 자기 생명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먼 고장/세상"에서는 헛된 약속으로 가득한 다른 소리가 들린다. 예수가 세례 사건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사랑하는 이'라는 소리를 들은 뒤에 광야로 나아가 들어야 했던 그 소리들이다. 세상에 나아가 성공하고 인기 있고 강력한 존재가 되어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라는 소리다. 그 소리들은 '사랑'이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 소리들은 부모와 친구,교사와 동료,특히 대중매체를 통해 거듭 새삼 들려온다. 이 소리에 반응할 때 나타나는 분노,쓰라림과 후회,질투와 복수,탐욕과 적대감,경쟁심 따위는 내가 집을 떠나 있다는 분명한 징표이다. 이때 나는 사랑받지 못하고, 살해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나 자신을 방어하고,사랑을 받아내려고 온갖 전략을 짜느라 정신이 없다.
여기서 삶이란'생존을 위한 '불안한'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비판 하나가 나를 화나게 만들고,조그만 거부 하나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작은 칭찬 하나가 나의 기운을 돋우고, 작은 성공 하나가 나를 들뜨게 만든다 나를 뒤흔들리기에 아주작은 것 하나로 충분하다. 세상은'만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말한다: 만일 네가 외모가 좋고,똑똑하고,부유하면 난 너를 사랑해,만일 네가 좋은 교육,멋진 직업,좋은 인맥을 갖고 있다면 난 너를 사랑해,난 네가 많이 생산하고, 많이 팔고,많이 구매하면 너를 사랑해,세상의 사랑에는 끝도 없이 '만일들'이 숨어 있다. 이 '만일들'은 나를 노예로 만든다."
조건부 사랑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이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다. 작은 아들은 그곳에서 사랑을 잃어버리고, 돈과 건강과 명예와 자기 존중심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서,작은 아들은 머리카락이 없다. 감옥이나 군대,수용소 재소자처럼 머리카락을 깎이면 개별성도 사라진다. 그는 속옷으로 겨우 야윈 몸을 가리고 있으며,흉터 입은 왼발은 다 떨어진 샌들에서 미끄러져 나와 있고, 오른발은 부러진 샌들을 겨우 걸치며 고통과 비참을 말해준다. 엉덩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단검만이 그가 아직 '아버지의 아들'임을 알려준다.
아들은 더 이상 동료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근원적인 고립감을 느끼며 이방인처럼 살아왔다. 그는 가족과 친구,공동체에서 분리되어,살기 위해 돼지나 먹는 열매 꼬투리를 찾으면서 자신이 짐승이 아니라,'인간'이고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이 고통스럽지만 희망에 찬 경험이 우리를 영적 투쟁의 한가운데로 데려간다. 이 아들처럼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 베드로는 그분을 부인했다. 여기서 유다는 자신이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라는 진리를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 없어서 목을 맸다. 베드로는 절망 속에서도 그 진리를 놓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그분에게 돌아갔다. 유다는 죽음을 선택했고,베드로는 생명을 선택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아무리 그릇된 길을 간다고 해도,"매우 좋다"(창세 1,31)하셨던 하느님의 판단과 우리가 지닌 본래의 선함이 철회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믿어야 한다.
큰아들을 만나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큰 아들은 아버지를 바라보지만 기쁨이 없다. 그는 아버지처럼 동생을 포옹하거나 웃거나 환영하지 않는다. 그냥 서 있을 뿐이다. 이 그림에서 '돌아옴'은 화면 왼쪽에서 일어나며,화면 오른쪽은 큰아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 놓여진 어둡고 커다란 빈 공간은 해결을 요청하며 긴장을 자아내고 있다. 아버지와 큰 아들은 수염을 기르고 어깨를 덮는 망토 때문에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몸을 굽히고 있지만,아버지의 넓은 망토는 환영을 뜻하지만,큰 아들의 망토는 밋밋하게 지팡이처럼 수직으로 내리꽂혀 있다. 아버지의 손은 빛 속에서 작은 아들을 껴안고 있지만,큰 아들의 손은 그늘 속에서 깍지를 끼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오는 빛은 그의 몸 전체에 흘러내리고 특별히 손을 밝혀 주고 있지만,큰 아들 얼굴 위의 빛은 차갑고 옹색하다.
헨리 나웬은 큰 아들 역시 작은 아들처럼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집에 늘 있었으나 사실 마음은 집을 떠나 있었다. 맏아들은 부모에 대한 복종과 의무에 충실한 경우가 많다. 그들은 부모를 실망시킬까봐 두려워하며,자신의 복종적이고 책임 있는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다른 동생들을 볼 때마다 시기심이 일어난다. 그들이 나보다 더 자유롭고,온갖 즐거운 시간을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작은 아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남도 알고 자기도 아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비참함을 겪고 용서를 청하며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큰 아들의 잃어버림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큰 아들의 원망은 동생이 돌아오자 터져 나온 아버지의 기쁨에 마주쳤을 때에야 뿜어져 나온다.
사실 올바르고 의로운 사람들 가운데 이런 분노와 원망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렇게 사는데 재들은 저래도 되나? 하는 판단과 단죄와 편견이 존재한다. '죄'을 피하는데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겐 얼음장 같은 분노가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는 큰 아들이 들에서 돌아 왔을 때 이미 잔치가 무르익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하인을 통해 '나중에'듣게 된 큰 아들은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기쁨과 원망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돌아온 탕자>그림에서 큰 아들은 사랑의 빛이 비추는 원 바깥에 서 있다.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다. 헨리 나웬은 "원망과 불평은 신비하게도 칭찬할만한 태도에 붙어 있다."고 말한다.
"과제를 잘 성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바로 그때에,나는 왜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던지지 않는지 질문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나는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투를 느낀다. 마치 나의 고결한 자아가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또한 원망스러운 불평꾼이 있는 것 같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두 형제를 좋은 아들과 나쁜 아들로 갈라놓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버지 홀로 선한 분이다.
하느님은 작은 아들을 큰 아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아,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그리스어 '아들'을 뜻하는 '테크논'(teknon)은 애정 어린 "얘야!"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방어하지도 큰 아들의 태도를 두고 뭐라 하지도 않는다. 한계가 없는 그분의 사랑은 전적으로 두 아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진다. 다만 자식들의 개별적인 여정에 따라 그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렘브란트,시메온의 예언 Simon in the temple
그러나 큰 아들은 '비교'를 통해 동생이 자신보다 더 사랑받는 것처럼 불평한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동생'이 아니라 불한당 같은"(당신의)저 아들이 오니까..."라고 말한다. 이 말은 동생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곁에서 밀어내는 말이다. 그 순간 큰 아들에게는 더 이상 동생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동생은 죄인이고,아버지는 노예 소유주일 뿐이다. 그는 이처럼 자신의 집에서 이방인이 된다. 더 이상 통교는 없고 모든 관계가 어둠에 뒤덮힌다.
돌아온 아들 이야기는 나를 찾아 나서고, 나를 찾을 때까지 쉴 수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큰 아들이 집에 돌아오려면, 이런 아버지를 신뢰하고 매사에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을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그래서 헨리 나웬은 우리가 자신에게 늘 이렇게 말하라고 제안한다.
"하느님은 너를 찾고 있다. 그분은 너를 찾기 위하여 어느 곳에도 갈 것이다. 그분은 너를 사랑한다. 그분은 네가 집에 있기를 원한다. 그분은 너와 함께 있을 때까지 쉴 수가 없다."
무조건 사랑하시는 아버지
헨리 나웨은 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의 유일한 권위는 '연민'이라고 말한다. 이 권위는 자녀들의 죄가 그분의 마음을 찌르도록 놔두는 데서 온다. 그분의 마음에 엄청난 슬픔을 일으키지 않는 잃어버린 자녀들의 욕망,탐욕,분노,원망,질투,복수는 없다. 그 슬픔을 감당하는 아버지에게서 헨리 나웬은 자신이 믿고 싶은 아버지를 발견한다.
"창조의 시작부터 자비로운 축복 속에 팔을 뻗치는 아버지,아무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항상 기다리기만 하는 아버지,실망 때문에 팔을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으며 다만 자녀들이 항상 돌아오기만을 바라는 아버지,그리하여 그들에게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고 피곤한 팔을 그들의 어깨 위에 얹을 수 있는 아버지가 있다. 그분의 유일한 갈망은 축복하는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진정한 중심은 아버지의 손이다. 손에 모든 빛이 집중되어 있고, 방관자들의 눈이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손에서 자비가 육화되고 있다. 손들은 내가 잉태된 순간부터 나를 붙잡고 있었고, 내가 태어날 때 나를 환영했으며, 나를 어머니의 가슴에 가까이 안아 주었고, 나를 먹이고 나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손들은 위험할 때 나를 보호해 주었고, 슬플 때에 위로해 주었다. 손들은 나에게 이별을 알려주었고, 돌아올 때 항상 환영해 주었다. 이 손들은 하느님의 손이다. 또한 나의 부모,선생,친구,치유자,그리고 내가 얼마나 안전한지 알려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 준 모든 사람들의 손이다.
그림에서 아버지의 왼손은 강하고 근육이 발달된 손이다. 이 손은 돌아온 아들의 어깨와 넓은 등을 다 덮고 있으며,힘주어 아들을 붙잡고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손이다. 오른 손은 섬세하고 부드럽고 온화하다. 손가락은 서로 가깝고 모습은 우아하다. 이 손은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위안과 편안함을 준다. 그것은 어머니의 손이다. 그는 붙잡고 그녀는 쓰다듬는다. 그는 확신시키고 그녀는 위로한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이사49,15-16)
붉은 망토는 따스한 색깔과 아치 모양으로 환영과 편안함을 주는 장소로 보인다. 피곤한 여행자를 위한 천막으로도 보인다. 새끼 새를 보호하는 어미 새의 날개로도 보인다. 이 어머니 하느님은 제멋대로 살았던 작은 아들을 환영하러 달려 나갈 뿐 아니라,큰 아들도 만나러 간다. 큰 아들에게도 그의 기쁨에 참여하라고 열렬히 간청한다. 우리들의 아버지요 어머니인 하느님은 비교하지 않는다. 그분은 득점 게시판을 갖고 있지 않다. 그 사랑은 비교하지 않고 모든 이를 그 고유한 모습대로 맞추어 사랑한다. 그분은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시고,무제한의 무조건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며,그분처럼 사랑하는 존재가 되라고 요청한다.
헨리 나웬은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를 발견할 기회를 드리고,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도록 함으로써 하느님을 웃게 한다면 멋진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남는 영적 투쟁은 자기 비하,자기 혐오,자기 거부와 싸우는 것이다. 세상과 그 악마들은 나를 가치 없는 존재,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라고 꼬드긴다. 자본주의는 소비자들의 자존감이 낮아지도록 조작하고, 오랫동안 교회안에서도 낮은 자기 평가를 미덕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자부심을 억압하고 자기 비난을 칭찬하는 신앙은 하느님의 첫 번째 사랑을 부인하고,나의 본래의 선함을 무시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애걸하기 전에 용서하고,간청하기 전에 당신의 기쁨을 나누려고 한다.
아버지의 집에서 식솔이 되어
아버지의 식사로 부르는 초대는 하느님과 맺는 친밀한 관계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최후만찬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고 했다. 잔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하고, 이 기쁨에 모든 이가 초대받았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성경의 비유에서든 렘브란트의 그림에서든 '그 이후' 어떤 결말이 이루어졌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동화처럼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더래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잃었던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는 것이다. 아직 모든 곳에 평화가 오지 않았고,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기쁨이 중요하다.
"우리들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거부,고통,그리고 상처가 있지만,일단 모든 고통 속에 숨어 있는 기쁨을 주장하기로 선택하면,삶은 잔치가 되어간다. 기쁨은 결코 슬픔을 부인하지 않으며,다만 슬픔을 더 많은 기쁨을 위한 비옥한 토양으로 변화시킨다."
헨리 나웬은 "하느님에게 숫자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온 인류가 희망을 잃고 스스로를 소진시켜 버릴 때,한 사람,두 사람,혹은 세 사람이 기도를 계속하여 세계를 파멸로부터 구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픈 세상에서도 자신이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식솔이라는 데서 오는 게 성인들이 누리는 기쁨이다. 아시시 프란치스코와 떼제공동체의 로제 슐츠,콜카타의 마더 데레사에 이르기까지,기쁨은 하느님 백성들의 특징이다. 엄청난 가난과 정치경제적 격변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도 이런 기쁨을 찾을 수 있으며,그들은 이미 하느님의 집에서 음악을 듣고 춤출 수 있다. 이들은 어둠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어둠 속에 살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어둠보다 빛을 더 신뢰하며,작은 빛 하나로도 많은 어둠을 흩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빛의 섬광을 이곳저곳에서 서로에게 비추고,그들이 하느님의 숨겨진 그러나 실제적인 현존을 드러내고 있다고 서로에게 각성시킨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낫게 해주고,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소유물을 나누며,공동체의 정신을 함양하고,받은 선물들을 기념하며,하느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나기를 항상 고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인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이지만,또한 완전한 기쁨의 사람이다. 예수님과 하느님이 일치는 그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낄" 때조차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 이 기쁨이 우리에게도 주어진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너희도 내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내 기쁨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결국 아버지가되어야 한다
렘브란트 그림에서 발견하는 영적 삶의 마지막 단계는 아버지에 대한 온갖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그 결과 우리가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기로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나는 영원한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고,나의 삶에 대해 아버지가 있음을 핑계로 삼을 수 없다. 나는 감히 나 자신의 손을 뻗쳐 축복을 해야하고, 나의 아이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든지,그들을 최고의 연민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연민이 충만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영적 삶의 마지막 목표이다."
예수님이 말했던 가장 본질적인 선언은 이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자비하신 것처럼,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단순히 사람들이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나의 약점을 눈감아주시니,내가 무엇을 하든 놔두리라 계속 희망하게 된다. 이런 낭만적 감상주의는 복음 메시지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그러므로 나는 나의 아버지 집으로 걸어 들어가 그분이 나에게 주었던 똑같은 연민을 다른 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운명이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버지가 되라는 도전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식솔로서,그분처럼 사랑하고,그분처럼 선하고, 그분처럼 보살필 수 있다. 이 사랑은 경쟁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되갚는 것을 바라지 않는 무조건의 사랑이다. 헨리 나웬은 이런 사랑은 세 가지 길을 거친다고 말한다. 애도와 용서,관대함의 길이다. 눈물 없이 슬퍼하고, 조건 없이 용서하며,남김없이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제자의 표지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이런 태도는 자동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훈련이 필요하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에너지,시간,돈과 관심까지 내어주는 것은 어렵다. 그들을 기꺼이 용서하기도,심지어 그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것이 가능하려면,영적 의미에서 나에게 반항하는 사람 역시 나의 '친족'이며,나의 '가족'이라는 진실을 믿어야 한다. 아무것도 바라거나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사랑할 때 기쁨이 오리라 믿어야 한다. 그래야 늙은 시메온이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했던 말을 우리도 할 수 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루카2,29)그 두려운 공허 한가운에 완전한 신뢰,완전한 평화, 완전한 기쁨이 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의 거룩한 비움과 만날 때마다.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거기에는 '하느님의 천사들의 위대한 기쁨"(루카 2,32)이 있다. 그것은 돌아오는 아들 딸들을 위한 기쁨이다. 영적 아버지다움의 기쁨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내가 아이였을 때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 두었습니다."(1코린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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