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부석사/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소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죽음도 불사한 '사랑의 의지'
먼 남녘에서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벗에게서 카드 메일이 왔다. 열어보니 정호승 시인의 시 「우리가 어느 별에서」가 안치환의 목소리로 흘러 나온다. 노래에 잠긴다. 시에 잠긴다. 시가 그대로 노래인,어둔 밤 눈물 같은 이 반짝거림. 내 어린 벗은 요즘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슬픔이 기쁨에게』를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다고 한다. 아주 아주 낡은 책에서 좋은 냄새가 난단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세상에 나온 시집을 읽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녀,시가 세상에 와 어느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길은 참으로 신비다. 그 애에게 답 메일을 보냈다. 거기에 정호승의 시로 만들어진 노래 중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부치지 않는 편지』를 동봉했다..'(...)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뒤 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백창우가 곡을 만들고 김광석이 부른 노래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뻐근해진다. 소주를 딱 한잔만 하고 싶어진다.
정호승 시인에게서 나는 종종 구도자의 느낌을 받는다. 사랑의 화두를 온몸으로 짐 진 채 전 생애를 걸고 떠난 구도행,슬픔,그리움,절망,외로움,희망,사랑,이런 단어들이 한꺼번에 떠오른다. 그는 데뷔 이래 세번이나 스스로 시업(詩業)을 쉬었다. 이 공백기들에 그는 참담한 절망을 건너온 듯하다. 절망이 깊어도 끝내 사랑을 버릴 수 없었던,아니,오직 사랑에 의지해 캄캄한 터널을 통과해온 구도행의 정점에 이 시가 있다고 할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해인사 큰스님의 법어에서 충격을 받고 기어이 시로 빚어진 이것은 죽음도 불사한 사랑의 의지다. 순도 높은 '오직 사랑'이다. 낮고 그늘진 변두리 사람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가슴 싸한 슬픔으로 번지던 시편들에서 7년의 공백을 거쳐 나온 다섯 번째 시집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는 극한의 고통을 통과해 나온 자리에 핀 한 떨기 붉은 열매처럼 오롯하다. 진저리친다. 이 조용한 구도자의 사랑법은 온몸이다. 정호승의 사랑은 스스로 등신불이 되고자 한다.
'아직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려운지/미나리 다듬듯 내 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 드리리/마지막 남은 한 방울 눈물까지도/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까지도/그대의 식탁 위에 토막토막 잘라 드리리'(「모두 드리리」부분) 사랑이 부박해져가는 시대이지만, 소름 끼치도록 염결한 사랑의 의지가 세상 한 녘에서 이렇게 타오르는 한 오라,절망아,사랑은 당신의 상처를 치유하고야 말 것이다.
-김선우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비채
부치지 않은 편지/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부치지 않은 편지 (김광석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ptSpOPFtLXk
모두 드리리/정호승
그대의 밥그릇에 내 마음의 첫눈을 담아 드리리
그대의 국그릇에 내 마음의 해골을 담아 드리리
나를 찔러죽이고 강가에 버렸던 피 묻은 칼 한자루
강물에 씻어 다시 그대의 손아귀에 쥐어드리리
아직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직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일이 더 어려운지
미나리 다듬듯 내 마음의 뼈다귀들을 다듬어
그대의 차디찬 술잔 곁에 놓아드리리
마지막 남은 눈물 한방울까지도
말라버린 나의 검은 혓바닥 까지도
그대의 식탁위에 토막토막 잘라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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