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view
렘브란트의 '볼품없는' 그리스도
<렘브란트의 하느님>,
안재경 지음,홍성사,2014
"아무리 많은 자랑거리가 있다 해도 인생은 하느님 손 안에 있는 작은 공깃돌에 불과하다." <탕자의 귀환>으로 유명한 렘브란트의 말이다.
영성작가 헨리 나웬은 이 그림에 영감을 받아 "우리 인생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라고 했다. 그 아버지는 자비롭고 자비롭고 자비롭기 때문이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비의 희년'을 선포 했을 때도 이 그림이 가장 먼저 주목받았다. 네덜란드 한인학교에서 일했던 안재경 목사가 지은<렘브란트의 하느님>(홍성사,2014)이란 책을 읽었다. 네덜란드는 루벤스와 반 고흐와 렘브란트(Renbrandt van Rijn)는 1606년 네덜란드의 레이든에서 태어났다. 그는 레이튼 라틴어학교를 졸업하고 레이든 대학에 진학했지만,그림을 그리려고 중퇴하고,반 스바넨부르와 피터 라스트만에게서 도제생활을 하다가 화가로 독립했다. 그가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그린 첫 작품이 <스테파노의 순교>(1625)이다. 여기서 렘브란트는 '예수님을 믿는 길은 날마다 죽는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그는 복음과 종교개혁의 정신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나는 환쟁이가 되었지만 스스로는 목사,신학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말로 구구절절이 복음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그림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가톨릭은 눈 먼 장님,개신교는 눈 뜬 장님
마르틴 루터보다 에라스무스를 더 존경한 렘브란트는<토빗과 안나>(1626)라는 작품에서 아내가 새끼염소를 훔쳤다고 생각하면서 슬픈 표정으로 기도하는 토빗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렸다. 토빗이 시력을 상실하자,아내인 안나는 하루 종일 베를 짜서 주인에게 갖다 주고 삯으로 새끼염소 한 마리를 얻어 집에 들어 갔다. 그러나 눈이 먼 토빗은 아내의 말을 믿지 못하고, 안나는 당혹스러울 뿐이다.
가톨릭교회에서,하느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온갖 성물은 신자들의 믿음을 북돋우기위한 도구였지만,구복신앙과 미신을 조장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를 문제 삼은 종교개혁가들을 로마교회는 단죄하는 데 급급했다.
"우리가 어머니처럼 의지하고 따랐던 로마교회가 우리의 눈을 멀게 만들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집착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구원을 보고 만질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라는 말만큼 우리 눈을 멀게 한 것도 많지 않다. 로마 가톨릭은 우리가 발견한 복음을 새로운 것이라며 이단으로 몰았지만,우리 공화국(네덜란드)은 스페인의 압제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종교개혁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렘브란트는 그렇다고 종교개혁을 무조건 환영하지도 않았다. 미신에 물든 가톨릭이 '눈먼 장님'이라면 개신교는 물질에 눈이 어두워진 '눈 뜬 장님'이라 했다. 그에게 종교개혁은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게 아니라 "하느님이 처음부터 제시하셨던 옛길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렘브란트는 몸을 떨었다.
폭풍속의 그리스도
깨어나야 할 사람은 예수가 아니다
렘브란트가 1631년 정든 레이든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뒤에 그린 그림이 <갈리래아 호수 폭풍 속의 그리스도>(1633)이다. 마르코복음 4장을 묘사한 이 그림에서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쳐 와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에 물이 넘쳐난다. 배가 곧 가라앉을 것 같다. 제자들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운다. 렘브란트가 이 그림을 제작할 당시에,네덜란드 공화국과 스페인의 항전이 극에 달해 있었다. 폭풍우 속에서 배를 어거하려 애쓰는 선원들의 모습에서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투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필자 안재경은 폭풍 속에 휩싸인 '한국교회의 위기'를 직감한다. 세상을 말세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교회 안에도 이미 그런 세상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이 말세라면 교회도 말세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잘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건너자고 해서 나선 길인데도 배가 폭풍우에 휘말렸다. 사실 폭풍을 불러온 것은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교회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든가,주일날 미사시간에 앉아 있는 것처럼 편한 곳이 없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복음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지만,우리를 늘 위기에 노출시킨다. 지금처럼 살지 말라고 흔들어 깨운다.
사실 우리 신앙생활에는 거품이 너무 많이 끼어 있다.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실상 자기감정에 따라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 문제가 생기면 제자들처럼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서 왜 이렇게 된거냐고 따진다. 왜 예수님을 믿는데 나아지는 것이 없냐교,그러나 믿음이란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불확실함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일이다. 이스라엘의 아합왕 시절,바알과 아세라의 예언자들은 바알신을 불러내기 위해 하루 종일 뛰고 구르고 심지어 칼로 몸을 상하게까지 했다. 아무 응답이 없자 예언자 엘리야가 아세라의 예언자들을 조롱한다. "더 크게 불러 봐라,혹시 너희 신이 출장을 갔는지,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는지 모르겠다."라며 조롱했다.
렘브란트는 이렇게 말했다. "다를 자기들이 깨어 있어야 함은 생각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우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언제 잠드신 적이 있는가? 십자가의 깃발아래 모인 교회들이 이전투구 하듯이 자신이야말로 교회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사실 깨어 있어야 할 존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자신이라고 렘브란트는 말한다.
볼품없는 그리스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렘브란트가 성경을 주제로 그린 최초의 걸작이<그리스도의 수난>(1633~1646)연작이다. 네덜렌드 공화국통령 프레데릭 헨드릭이 주문한 이 연작은 루벤스의 제단화를 본뜬 것이지만,여기서 그려지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렘브란트의 십자가 그림은 유대인을 공경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경건을 위한 묵상용 자료도 아니었다. 그의 십자가는 자신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앞장 선 자라는 깨달음에서 나왔다. 그림에 렘브란트 자신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자신과 당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렘브란트는 수난 받는 그리스도를 너무나 볼품없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것은 루벤스의 묘사와 달랐다. 루벤스를 포함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를 본받아,고상한 주제는 근엄한 스타일로,일상적인 주제는 평범한 스타일로 그렸다. 선은 아름다움과 어울리고,악은 추함과 어울린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도들과 예수님은 순교하고,죽는 순간에도 강인함과 지혜를 갖춘 영웅다움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렘부란트는 이상화된 인물묘사가 성경의 인물과 역사를 그리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렘브란트가 보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한 영웅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가지로 철저하게 연약한 인간의 죽음이었다. 신앙인은 이 예수님을 통해 나 자신의 죽음을 보아야 한다.
렘브란트는 강생의 신비를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낮은 곳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종의 신분으로 낮아지셨는데 어떻게 영웅적인 모습으로 그릴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을 영웅으로 그리는 것은 예수님의 육체성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하는 것이다. 렘브란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인간적으로 그려서,통령 프레데릭 헨드릭을 포함하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생들이 그리스도께서 대신해주신 죄 많고 연약한 인생들임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재판정에 선 예수,
권력을 버리고 정의로운 나라를 꿈꾼 사나이
렘브란트의 에칭 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에케 호모>(Ecce Homo)이다.빌라도가 재판정에서 예수를 유대인들 앞에 세우며 한 말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이다. 렘브란트가 이 작품을 제작한 해는 공교롭게도 암스테르담 새 시청사가 완공된 해다. 이 청사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위용을 자랑하는 역사적 건축물로,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행정복합건물이었다. 이 청사의 최고법정을 연상시키는 빌라도의 법정 조각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으며,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칼을 쥐고 있다. 오른 편에 있는 권력의 여신은 한 손을 선반에 놓고,다른 손으로 몽둥이를 쥐고 있다. 이 법정에서 빌라도는 정의롭게 법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권력으로 밀어붙여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지상에서 정의와 권력은 대척점에 있다. 정의는 종교의 일만도 아니고,권력은 정치의 일만 아니다.정치든 종교든 권력다툼이 있을 수 밖에 없고,정의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권력과 정의가 손잡고 갈 수 있는가? 권력없는 정의는 실행할 방도가 없다. 반면 정의 없는 권력은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서 독립하고 상업국가로서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영광을 누리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한껏 부풀어 있는 공화국을 향해 정의와 권력이 제대로 손을 맞잡고 가지 않으면 사람을 살리기보다 죽이는 일이 자행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권력의 여신이 평온한 얼굴이 아니라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처럼,권력은 정의를 우습게 보고 있다. 권력은 늘 정의를 자기 손안에 가두어 두려고 한다. 안재경은 이참에 빌라도 총독이 "보라,이 사람이로다."하고 말하기 전에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그분의 나라는 '권력'이 아닌 '정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에케 호모>를 제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재판받으신 재판정에 암스테르담의 시청사를 끌어다 댄 것은 의도적이었다. 과연 우리는 거대한 위용이 드러난 암스테르담 시청사를 통해 제대로 된 정의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시청사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신들의 투쟁,정의와 권력의 여신들의 투쟁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재현되지 않겠는가? 거대한 로마제국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디. 제국의 수도를 화려하고 풍요롭게 유지 하기 위해 제국의 변방에서 착취한 재화가 얼마나 컸던가? 로마가 무너진 것도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착취구조가 스스로를 무너지게 하지 않았던가? 이 시청사가 나중에는 왕궁으로 변하고,그래서 우리 공화국이 또 하나의 작은 제국으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탕자의 귀환,아버지 없는 시대에
말년에 렘브란트는 가산을 처분하고 암스테르담을 떠나 로젠흐라흐트에 작은 집을 빌려 이사한다. 그 마지막 10년 동안 렘브란트는 고독과 싸우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최소한의 음식으로 만족하고 소박한 옷과 음식으로 살아가며 자화상을 그리는데 집중했다. 영원을 사모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리고 싶었다. 그때 제작한 역작이 눈 멀고 늙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안으려는 장면을 그린<탕자의 귀환>(1668)이었다. 루카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였다. 그해 9월 4일에 렘브란트는 사랑하는 아들 티투스를 흑사병으로 떠나보냈다.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를 향해 빛이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지만,아버지의 눈은 반쯤 감겨있고,피곤에 절어있다. 아들을 죽기 전에 볼수 있을지 밤낮 걱정하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망토가 늙고 수척한 아버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의 두손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아들의 어깨를 감싸고 있다.그런데 오른손은 여인의 손을 연상시키고,왼손은 정형적인 남자의 손이다. 그 손은 <유대인 신부>(1665)에 등장하는 남녀가 서로 화답하듯 부드럽게 얹고 있었던 손들을 그대로 이 그림에 옮겨놓은 것이다. 성경의 하느님은 마초(macho)가 아니다. "해산한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말씀처럼 하느님은 어머니다운 모습이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잃어버린 렘브란트에게는 돌아와 품에 안길 자식조차 없다. 어쩌면 탕자라도 좋으니 돌아와 안길 아들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한편 오른쪽에 나무토막 서 있는 큰아들은 뻣뻣하게 뻗어있는 그의 망토처럼 비정한 모습이다.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권세와 힘을 상징한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동생에게 채찍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묻고 있는 것 같다. 동생의 죄를 묻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큰아들의 불만이 수직으로 드리워진 지팡이처럼 긴장감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품에 안긴 탕자는 외투는커녕 야윈 몸뚱이를 겨우 감쌀 수 있는 속옷 차림이다. 남은 거라곤 엉덩이 쪽에서 덜렁거리며 붙어 있는 칼뿐이다. 모든 자존심이 무너진 가운데서도 명문가의 자식임을 알려주는 것은 이것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종으로 써달라고 청한다. 다 헤어지고 벗겨진 신발 그리고 상처투성이 발에는 탕자의 모진 삶과 굴욕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림에서 탕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종교화에서는 흔히 회개하는 이의 절실한 얼굴을 통해 그가 구원 받을만한 사람인지 가늠케 한다.
그러나 <탕자의 귀환>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회개 여부와 상관없이 그를 받아들인다. 아버지의 사랑은 회개 여부에 달린 문제가 아니다. 사랑에 조건이 없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처럼,죽음을 예감하며 자신도 그 집 나간 탕자처럼 돌아와 하느님 아버지 품에 안길 것을 학수고대하였다.
안재경은 이 그림을 묵상하면서 '아버지가 없는 시대'를 발견한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생리적인 끈 정도로만 생각한다. 자식들은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까지만 부모에게 어쩔 수없이 붙어 있다. 사실 자식도 남과 다를바 없다. '자식 부재의 시대'이다. 아버지에게 집은 하숙집이 된 지 오래고,자식들에게 집은 기숙사가 된 지 오래다. 수십 억 짜리 타워 팰리스 아파트에 살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집은 어떠한가? 그 집은 대궐 같은 집이라서 우리 모두 천국에 가길 그렇게 희망하는가? 그 집은 다만 <탕자의 귀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자비로운 아버지'가 계시다는 점에서만 다른 세상이다.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다
1669년 10월 4일,렘브란트가 세상을 떠나던 날,그의 이젤 위에는<아기 예수를 안은 시메온>이 미완성인 채로 놓여 있었다. 예루살렘에 살던 시메온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렸다. 시메온은 결국 성전에서 예수 아기를 안고서 이렇게 하느님을 찬양했다.
"주님,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0)
렘브란트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눈 먼 시메온을 그리면서,스스로 아기가 되어 하느님 품에 안길 것을 소망하며 눈을 감았다. 렘브란트는 하느님이야말로 자기 자녀를 그분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그 넓은 품으로 안아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 후회 많은 인생이라도 그분의 품은 따뜻하고 조건 없이 품어준다. 이를 두고 현대 영성작가인 헨리 나웬은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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