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그리고 시

감꽃/김준태

모든 2 2017. 7. 18. 13:35

 

 

감꽃/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참깨를 틀면서/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12월의 戀歌/ 김준태

겨울이 온다 해도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멀리서 밀려오는
찬바람이
꽃과 나무와 세상의
모든 향기를 거두어 가도
그대여!
나는 오히려 가슴 뜨거워지리

더 멀리서 불어오는
12월 끝의 바람이
그 무성했던 그림자마저 거두어 가버릴지라도
사랑이여, 나는 끝끝내
가슴 뜨거워 설레이리

저 벌판의 논고랑에 고인 조그마한 물방울 속에서도
때로는 살얼음 밑에서도 숨쉬며 반짝이는 송사리떼들
그 송사리떼들의 반짝임 속이라도 내 마음을
부벼 넣으리

어쩌면 상수리나무
몇 그루처럼 산등성이에 머무는
우리 시대 그대여,
겨울의 그 끝은...
오히려 사랑의 처절한 불꽃으로 타오르리

지금은 두 손뿐인
그대여!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김준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 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와 달이 곤두박질치고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만 뒤집어쓸망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몸에 상처뿐인

죽음뿐인 하느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 버렸나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사랑할 수 없어 죽어 버렸나

정말 우리들은 아주 죽어 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산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구나

 

(여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문밖에 나가 당신을 기다리다가

나는 죽었어요…… 그들은

왜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갔을까요

셋방살이 신세였지만

얼마나 우린 행복했어요

난 당신에게 잘해 주고 싶었어요

아아, 여보!

그런데 난 아이를 밴 몸으로

이렇게 죽은 거예요, 여보!

미안해요, 여보!

그들은 나에게서 나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나는 또 당신의 전부를

당신의 젊음 당신의 사랑

당신의 아들 당신의

아아, 여보! 내가 결국

당신을 죽인 것인가요?)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 아들이여

 

 

예수는 한 번 죽고

한 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 번을 죽고도

몇백 번을 부활할 우리들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를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르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 갈 청춘의 도시여

지금 우리들은 확실히

굳게 뭉쳐 있다 확실히

굳게 손잡고 일어선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Gwangju, Cross of Our Nation)19805, 한반도의 남녘 도시 광주에서 공수계엄군의 총칼에 맞서 일어난 '5·18광주항쟁 / Gwangju Upring'을 최초로 형상화한 시로 동년 62일자(전남매일 ; 2개월 후 군사파쇼정권에 의해 강제 폐간됨) 신문 1면에 일부 게재되었으나 이날 바로 삭제되지 않은 시 원문 전체가 외신을 타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지로 흘러나가 발표되었다.

 

*김준태(金準泰, 1948~ ) 전남 해남출생의 시인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목요회(木曜會)》동인으로 활동

1969년《전남일보》《전남매일》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시인>,<머슴>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

1977년 첫 시집 <참깨를 털면서> 발간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발표한 이유로 해직됨

조선대학교 인문대 초빙교수 역임

작품 경향은 산업사회하에 붕괴되어가는 고향을 주로 노래했으나 1980년 광주민중항쟁 이후부터는

광주사랑, 공동체정신, 생명중시, 인간해방, 식민문화 극복, 참나라·참세상을 열망하는 시를 썼음

시집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었다>(1981), <국밥과 희망>(1984), <불이냐 꽃이냐>(1986), <넋통일>

(1986),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1988), <칼과 흙>(1989),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1994)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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