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2017년 4.5월

모든 2 2017. 4. 21. 23:03



예수부활,제국에 대한 복음의 승리

-한상봉-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면서,가장 놀라운 것은 그분이 집 없이 세상을 떠도는 '이방인'처럼 살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차별받고 배제된 사람들처럼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저주'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련한 인생들의 손을 놓지 않으신 것처럼,하느님은 결국 다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다. 늘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셨던 예수님에게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소유였고,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고,예수님은 그런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식민지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우리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셨던 분이다. 그 천막을 짓부순 사람들은 "대사제와 수석사제,율법학자와 원로"로 상징되는 성전세력과 로마 황제의 하수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지배 권력이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거부한 사건이고,그들의 폭력과 도덕적 파탄을 드러낸 사건이다.

  박근헤 전 대통령이 2014년 4우러 16일 7시간 동안 종적을 감춘 사이에 세월호는 침몰하였고,2017년 3월 22일 검찰조사를 마치고 7시간 동안 거짓증언을 조서에 낱낱이 새겨 넣은 다음날인 23일 세월호는 인양되었고,박근혜가 구속되던 날 세월호는 목포신항으로 마지막 항해를 계속했다. 박근혜 정권의 민낯을 드러낸 가장 큰 동력은 결국 세월호 참사로 숨진 희생자들의 값진 죽음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시키면서 세월호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부활하고 있다.

  가야파와 빌라도의 이름이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듯이,박근혜 역시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추악한 이름을 오래 남길 것이다. 촛불광장에서 빠짐없이 부르던 시민들의 합창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노래가 예언이 되고,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예수의 삶이 예수를 죽였다.


 "예수님께서는..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3-5)


  하느님을 "압바'abba라고 친밀하게 불렀던 예수님은 그분이 '노예들의 하느님'임을 거듭 새삼 확신하였다. 요한복음에 따르면,죽음을 목전에 두고 맞으신 '마지막 식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점에서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단순히 알아들으면 안 된다.

처음에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치며 만류한 데는 이유가 있다. 유대인들은 그가 상전이라 해도 어느 누구의 발도 씻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규정에 보면,남의 발을 씻는 행위는 정결례를 위배하는 짓이었다. 하물며 종이라 해도 주인의 발조차 씻겨주지 못한다. 이 시대에 유대에서 남의 발을 씻을 수 있는 자는 정결례에서 벗어나 있는 '이방인 노예'뿐이다. 유대인 노예들은 같은 동족이기에 6년 안에 풀어주어야 하고,자기 재산도 소유할 수 있고,종교적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로 시리아에서 팔려온 이방인 노예들은 평생 주인에게 결박되어 가장 천한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겉옷'을 벗고,이방인 노예처럼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고아와 과부와 노예는 당시 가장 가난한 사람이며,천대받는 백성이었다. 이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왜 한사코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렸는지 알만하다. 그의 시선은 늘 '아래로만'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 세계의 바닥에서만 하늘이 맑아보였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시선이 아니고서는 '노예들의 하느님'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는 산상설교를 알아들을 방법이 없다. 백성들을 종교적 이유로 갈취하던 성전세력의 아성인 예루살렘의 좌판을 뒤집어 엎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예수님을 당대의 지배층이 곱게 볼 리 없다. 이런 사람이 군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지닌다는 사실은 성전세력에게나 로마에게나 불안한 일이다.

이제 예수님이 대사제와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 꼭 필요한 몇 마디를 던지고 시종 침묵을 지킨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들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던 예수님이다. 그러니 그들이 신성모독죄든 반역죄든 온갖 혐의를 걸어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아 죽인 것이다.


 여전히 살아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는 단서는 '빈무덤'이지만,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 계시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전갈이다. 그래서 빈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그분은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에게 삶의 현장이었다. 예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어느 낯선 사람'이 빵을 나누고 축성하는 순간에 그분을 경험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는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두번이나 연거푸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라."(21,19,22)였다.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여전히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 말할 수 있을 때,그분은 거듭 새삼 나를 통해 부활하신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그분을 느끼게 된다.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연민을 느낄 때,그 가난한 이를 위해 몸을 움직일 때,때로는 부당한 정치적-종교적 권력에 맞서 저항할 때,이념의 잣대보다'인간의 존엄성'을 높이 평가할 때,평등평화인권을 위해 헌신할 때,심지어 고양이를 잃어버려 슬퍼하는 소녀를 위로할 때,그분은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빌라도가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해 주신 사건이다. 예수님을 긍정하시고,예수님을 처형한 권력을 부정하셨다는 뜻이다. 부활절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 만약 예수님이 주님이라면,다른 주인(권력)은 '사실상'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한사코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거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붙여주었던 모든 칭호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게 붙여주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고,평화를 가져다 준 그리스도(왕,메시아)이시며,'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하고 말할 때,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황제의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하느님 앞에서 황제는 부정되었고 예수님은 긍정되었다. 그분이 나자렛의 어느 목수였다는 것은 가난한 우리 마음에 위로가 된다. 제국에 대한 복음의 승리를 믿기 때문이다.

  부활절이다. 얼음이 풀리고,찰진 흙이 부풀어 오른다.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그리스도인들은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 바다에 침몰한지 1073일 만에 세월호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세월 동안 유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이 겪은 아픔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이들을 조롱하고 "이제 잊자!"고 윽박지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그 희생자들은 긍정되었고,가해자들은 부정되었다.

  그들처럼 세상에서 차별과 배제로 고통 받는 이들이 긍정되고,권력과 그 부역자들이 탄핵을 당하는 세상이 오리라 희망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침몰해도 인양된다. 이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의 유일한 해결책은 사랑입니다

가톨릭일꾼운동과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영성

-브라이언 테렐-




  가톨릭일꾼운동은 대도시의 빈민가에서 집없는 사람들에게 급식을 제공하는 환대의 집을 운영하는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양심의 행위와 시민 불복종행위 때문에 일꾼들이 자주 법정에 서거나 감옥에 들어가는 적극적인 평화주의운동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떤 지정된 지도력도 없으며 일꾼자격에 관한 정의도 없고 서원이나 공식적인 양성의 과정,혹은 자격증이나 교회,정부의 인가도 없이 사는 것을 볼 때 베네딕도 수도회의 안정성보다 불확실성이 가톨릭일꾼의 특징으로 보이는 것 같다. 강렬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가톨릭일꾼운동의 행동주의와 베네딕도 수도회의 질서 잡힌 관상은 전혀 연관이 없거나 심지어 반대적인 전통들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신비스럽게도 순방 수도자들이나 방랑 수도자들과 많은 가톨릭일꾼들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 처음 가톨릭일꾼운동을 창립할 때부터 수도원은 영감을 주었으며,우스꽝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가톨릭일꾼운동의 중심에는 '관상적 소명'이 있었다.

  대부분의 가톨릭일꾼 집들은 베네딕도 수도회와 시토수도회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수도회들을 그들의 가장 충실한 지지자들로 갖고 있다.

아내인 베씨 키난과 나는 미조리주 클라이드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들의 기도와 환대,충고와 우정에 대해 감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가톨릭일꾼들도 특정한 수도회에 비슷한 감사의 빚을 지니고 있다.

  가톨릭일꾼이며 전례 미술가인 에이드 베선이 1940년 로드아일랜드 주의 포츠마우스 수도원의 제3회 회원이 된 뒤로 도로시 데이를 포함한 몇몇 가톨릭일꾼들도 제3회 회원이 됨으로써 이러한 관계가 공식화 되었다.

제3회 회원이란 어떤 특정한 수도회와 연결하면서 수도적 영성을 일상생활 속에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평신도들을 의미한다.


가톨릭교회와 신앙의 원천에 철저한 사람들


  젊은 시절에 심취했던 사회주의 성향의 움직임들을 떠나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 때에도 도로시 데이는 혁명적인 열정이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의 새로운 신앙은 불의와 가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더 깊게 해 주었다. 몇 년이 안 되어 도로시는 피터 모린을 만났고 자신처럼 느끼는 다른 가톨릭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터는 직접 도로시를 가르쳤고 교회가 전쟁과 평화,노동,경제와 인종문제에 관하여 고유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도와주었다. 도로시는 자신이 급진적이면서도 가톨릭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결국 가톨릭전통이 더 강력한 사회적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피터의 말에 의하면 칼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부르조아사회를 비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톨릭전통의 보다 강력하고 더 깊은 이 비판의식은 복음에서,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성인들의 삶 속에서,다양한 수도회들의 모범에서 그리고 베네딕도회의 회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원천들로부터 도로시는 그가 다른 곳을 보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던 어떤 깊이와 전체성을 깨달았다. 베네딕도 성인의 '나그네와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라."는 충고에서,특히 가톨릭일꾼운동이 그 가난한 이들을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여기는 이상을 통하여,가톨릭신앙의 깊이와 전체성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가장 절망적인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하기 때문에,가톨릭일꾼은 가난한 이들의 회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자신의 회심과 사회의 회심을 추구하는데,그 이유는 사회의 악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피터와 도로시가 시작했던 가톨릭일꾼운동의 프로그램은 애덕행동과 개인적인 희생으로 굶주리고 가난한 이들을 먹이며 입히고 있을 곳을 마련해주는 환대의 집들과 농촌경작공동체 그 이상을 지향한다. 불의한 사회질서의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불의한 질서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 혼란스럽게 갈라진 세계에 평화,질서 그리고 정의를 가져오기 위하여 도로시와 피터는 기도,손노동,공동체의 단순한 생활방식,환대,공부와 전례를 제안하였다. 두사람은 아일랜드의 수도승들과 초기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비폭력적 혁명으로 중세기 암흑시대를 구했던 것처럼 우리 시대의 어움에 빛을 가져오기 위하여 똑같은 "혁명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사회를 창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터 모린은 '선해지기가 더 쉬운"사회를 창조하고 "수천의 수도원들이 그들의 환대로써 당대 사회의 전체적인 양상을 변화시키지 않았던가" 라고 말했다. 도로시 데이는 "선서에 매이지 않고,우리 자신 안에 약하게 갇혀있지 말고,환대의 전통에 충실하기 위하여 비틀거리며 조금씩 하도록 노력해야한다."고 요청했다.


  사랑을 위하여 노동하기


  가톨릭일꾼운동은 베네딕도 수도회의 회헌으로부터 노동의 철학을 빌려왔다.도로시데이는 이렇게 썼다.


  "여기 가톨릭일꾼운동에서 우리는 노동에 관한 우리의 이상이(이 경우에 손노동을 의미함)잘 알려져 있음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피터모린은 손노동과 자발적 가난을 그의 가르침의 기반으로 삼았고,이것들이 우리 행동의 기술이라고 말했다. 항상 피터는 베네딕도 성인의 좌우명인 '기도하고 일하라'를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와 베네딕도회 회원인 버질 마이클 신부는 노동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관계에 대하여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통합적 삶(노동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에 관한 그의 비전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피터는 늘 우리의 정신뿐만 아니라 몸을 써야하는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물론 피터가 도시뿐만 아니라 땅에 대한 자본주의적,산업주의적 체제를 반대한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계속되는 창조사업에 동반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고,우리들의 노동은 공동선에 항상 기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많은 우리들의 직업은 이러한 이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가 하는 일 대부분은 그저 수입을 얻기 위해서이며,그 많은 일들은 창조적이지도 않고 우리 이웃의 공동선에 기여하지도 않는다.

  때로 우리가 하는 일들은 실제로 파괴적이며 죽음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해도 하느님의 창조와 반대되는 것들인 경우가 많다. 너무나 자주 우리의 일들은 우리자신들을 비인간화시키고 황폐하게 만들며 하느님이 섬기라고 요청하는 이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하고 있는 모든 일(직업)들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선물이 되지 않는다. 모든 일들이 다 "거룩한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일꾼농장들은 단순히 도시의 무료급식을 위한 생산자가 아니며,바쁜 도시인들을 위한 쉼터에 머물지도 않는다. 피터 모린은 농장들이 "농업경제대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농업경제대학이란 사람들이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그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립이나 험악한 개인주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온화한 상호의존을 향하여,또한 자신과 타인들 그리고 지구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얻는 방법을 습득하기 위하여 경작과 수공예의 기술과 원칙들을 배우는 곳이다. 베시와 나,그리고 아이들과 이웃들은 아이오와의 말로이에서 우리들의 작은 방식으로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정원에서 나오는 과일들과 염소젖을 먹고 살 수 있는 때까지 살고,수공예품을 만들고 약간의 다른 일을 함으로써 현금을 벌어 살고 있다.

  가톨릭일꾼운동의 오랜 친구이며 수도승인 렘버트 소르그 신부는 <손노동의 베네딕도 수도회 신학에 관하여>라는 그의 책에서 다름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의 신학은 결과적으로 농촌운동에 관한 확고한 주장이다.

즉 그리스도인 가족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종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땅에 정착하라는 주장이다."


  소르그 신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 주변에서 자라나는 평신도들의 공동체들의 손노동으로 그들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하고 지탱하며 수도승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의 애덕활동과 상호부조에 참여하는 것을 그렸다. "이러한 평신도 공동체들은 다른 형제들의 생계를 가로막고 그리스도 대신 자신들이 주님이 되기 위해 부자가 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소르그 신부는 또한 묻는다, "평신도들의 이런 공동체들이 어떻게 사랑을 위하여 일하지 않겠는가?"

  <사막의 지혜>에서 토머스 머튼은 동방 사막의 첫 번째 수도승들이 아마도 "무정부주의자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이름은 도로시 데이와 다른 많은 가톨릭일꾼들이 끌어안는 이름으로서,토머스 머튼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부패하고 퇴폐적인 정부에 의해서 소극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인도되거나 지배받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며,기존의 보수적인 가치관들에 따라서 노예처럼 살아가지 않아도 좋을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였다. 1968년에 사망하기 전 콜카타에서 토머스 머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도승들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매우 이상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수도승이란 주변머리의 사람인데,왜냐하면 현대세계에서 수도승은 더 이상 사회 안에 분명히 자기 자리를 잡고 있는 안정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도승은 근본적인 인간체험을 더 심화시키기 위하여 사회의 주변머리로 의식적으로 물러나는 주변부 사람이다."




  기도의 자리 , 사막에서 감옥으로


  신학자이며 작가인 짐 더글라스는 우리 시대처럼 온통 전쟁만 생각하고 준비하는 사회에서 참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고 기도할 수 있는 자리는 수도원이 아니라 '감옥'이라고 말했다. 4세기에 그런 자리는 사막이었으며,짐은 "오늘날 아메리카에서 자기 이탈과 가난의 자리는 감옥이다..

평화 만들기는 자발적으로 감옥에 가는 특혜적인 방식이다. 가난한 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이 늘 그곳에 있다. 우리가 감옥에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합류하고 우리 자신의 가난을 심화시키며 우리 주변의 폭력과 불의에 진리로써 응답을 계속한다면 하느님의 힘이 실제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수도원들은 감옥을 위한 수련소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뉴욕의 가톨릭일꾼 집에 살았을 때 도로시 데이는 우리 젊은 사람들에게 감옥에 갈 만한 무엇인가를 해보라고 때때로 제안하곤 했다. 도로시는 '작은 피정처럼"이라고 말했다. "시민 수도원"의 입소자로서 나 자신의 체험은 때때로 피정이 되기도 했고 안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감옥에서는 성무일도서가 보물이며 너무 힘들 때에 성무일도를 하면서 거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배우게 된다.


  5년 전 미국 핵전략산업에 대한 분쇄 시도 때문에 연방감옥에 갇혀있을 때 내 감방 바로 옆에는 1967년 중동전쟁 때에 예루살렘을 어려서 떠나온 팔레스타인 난민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그는 온 세계를 집 없이 나라 없이 떠돌아다녔고 우리를 만났을 때 그는 이 민법 위반 혐의로 일리노이의 감옥에 있었으며,알라신만이 알 수 있는 어떤 곳으로 추방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과 저녁에 이 열심한 무슬림 형제는<쿠란>을 아랍말로 부드럽게 노래했고 나는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침대에서 저녁기도를 바쳤다.


  사랑은 공동체와 더불어


  모든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이 다 도로시처럼 "평화"라는 좌우명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커리지빌에 있는 성 요한 수도원을 비롯한 몇몇 수도원들은 ROTC를 통한 군사훈련에 참여하고 있는 학교를 운영하였다.

  1966년 성 요한 대학교가 도로시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하겠다고 제의했을 때 도로시 데이는 고통스러운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다.

"내 심정은 정말 비참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귀대학에서 주는 큰 명예를 거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도로시는 학교의 총장인 콜만 베리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무엇보다 먼저 제가 성 요한 대학교를 사랑하고 피터 모린의 각별한 친구였던 버질 마이클 신부 시절부터 베네딕도회 수사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말하고자 합니다. 가톨릭일꾼운동 시작때부터 나는 베네딕도회의 환대를 늘 받아왔으며 또한 성 프로코피우스 베네딕도 수도원의 제 3의 회원이며 많은 가톨릭일꾼운동 종사자들도 제 3회 회원들입니다. 우리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배운 것을 다 나열한다면 이 편지는 아주 긴 편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귀 대학에서 관대하게 주시는 명예학위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친애하는 콜만 신부님,저는 당신이 제 뜻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특히 미국의 베트맘 참전에 비추어 볼 때,ROTC훈련에 대한 우리의 반대입장과 시민불복종운동에의 참여,병역기피(병역회피가 아니라)등등에 입각해서 말입니다."


  도로시는 자신의 자서전<긴 외로움>을 가톨릭일꾼의 종사자들,제3회 회원들,신비가들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들에게 남기는 말로 끝맺는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사랑입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조시마 신부의 말에 의하면,때때로 사랑이라는 말은 거칠고도 무서운 말이며 사람에 대한 우리 자신의 믿음도 용광로 속에서 단련을 받아왔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빵을 쪼개면서 그분을 알고 다른 사람도 서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천국은 잔치이며 삶 역시 잔치입니다. 부스러기조차도 천국에서는 나누어 먹습니다. 우리 모두는 긴 외로움을 알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사랑이라는 것,그리고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출처 <CatholicWorker>,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