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작가는 글을 통해 죽고 부활한다

모든 2 2021. 12. 17. 09:14

작가는 글을 통해 죽고 부활한다

조민아

 

  이 나이에도 창작의 꿈을 버리지 못해 뭐라도 시작하고 싶어 가을부터 글쓰기 모이에 참여하고 있다. 이른바 나의 '구역' 바깥에 살고 계신 분들과 함께 중단편들을 읽고 소설을 쓰고 나누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함께 읽은 소설 중 마침 내가 발제를 맡은 옌렌커의 중편 <골수>의 발제문을 소개한다. 정말 오랜만에 충격 받으며 읽은 소설이다. 스포일러 만땅이니 읽을 계획이 있는 분들은 그냥 패스하시길 바란다. 발제문 중에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은 작품에서 그대로 가져왔으므로 따옴표로 처리했다.

 

  옌롄커의 <골수>

 

  몸서리쳐지는 운명이다. 요우쓰댁의 자녀 넷은 모두 뇌전증과 관련된 질병을 갖고 태어났다. 평생 잦은 발작과 더불어 지적 장애까지 안고 살아가야 한다. 막내인 아들마저 질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던 날, 남편 요우스터우는 목을 매어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연약하고 소심한 혼령이 된 그는(혹은 요우쓰댁의 외로움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인 그는), 네 자녀와 스스로의 목숨을 홀로 떠맡게 된 아내를 차마 떠나지 못한 채 그녀의 길이 되고, 귀가 되고, 말동무가 되고, 때로는 원망과 분노와 죄책감을 들추어내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 곁에 머문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요우스터우와 살아도 살지 못하는 요우쓰댁은 그렇게 처연한 비체(卑體)로 바러우 산맥에 붙박여 있다.

 

  살아남은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사치인 요우쓰댁에게도 바램이 있다. 아이들 넷을 모두 출가 시키고 지독한 삶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것이 결핍으로부터 비롯되어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을 일컫는 것이라면, 결핍으로만 채워진 삶을 살고 있는 요우쓰댁의 바램은 욕망이라기보다 생존의 유일한 근거다. 그녀는 자식새끼들을 그나마 나은 환경에, 그들이 원하는 환경에 살도록 하고 싶을 뿐이다. 사지와 정신이 멀쩡하건 아니건, 숨이 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 숨을 존중하고 누릴 자격이 있다. 요우쓰댁은 자식들을 향해서도,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그 인간으로서의 숭고한 권리와 존엄을 포기하지 않는다.

 

 

  첫째 딸은 "절름발이"에게 시집갔다. 사위는 사과나무 묘목을 심고는 접붙이기를 해야 하는 것을 몰라 애써 심은 나무들을 모두 도끼로 찍어냈다. 고립되고 무지한 그들의 세월은 "영원히 깊고 고요한 골목 같았다." 둘째 딸은 "외눈박이"에게 시집갔다. 잠자리를 할 때마다 발작을 하는 둘째에게 사위는 임신과 출산을 강요했다. 결국 임신에 성공했지만 발작은 갈수록 심해진다. "사지 멀쩡한 사람"을 남편으로 원했던 셋째는 소원대로 겉 사람이 멀쩡한 남자에게 시집갔다. 신랑 될 이가 집에 오던 날 갑자기 병이 나은 듯 "배꽃같이"웃던 셋째는 게으르고 욕심 사나운 남편과 함께 집안의 모든 양식을 털어 수레에 싣고 떠나 버렸다. 셋째 누나의 몸을 집요하게 탐하던 막내 쓰샤는 누나가 시집 간 후로는 암컷 새끼 양과 닭과 오리를 탐한다. 요우쓰댁은 막내에게도 "사지 멀쩡한" 아내를 얻어 주고 싶다.

  셋째가 시집가던 날, 둘째 사위가 요우쓰댁을 찾았다. 발작증세가 심한 둘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사람의 뼈를 고아서 마시게 해야 한다는 꿈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자, 요우쓰댁은 주저 없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남편 요우스터우의 무덤을 파서 벌레 먹은 남편의 손뼈와 다리뼈와 두개골을 둘째 사위에게 준다. 뼈를 빼앗긴 남편 요우스터우의 혼령은 "햇볕에 오래 노출된 지렁이"같은 모습으로 요우쓰댁을 찾아와 아내의 삶이 서러워 흐느끼지만, 뼈를 고아 먹은 둘째는 거짓말같이 병을 고치고 멀쩡한 사람이 되었다. 딸의 모습을 본 요우쓰댁은 바러우 산맥이 떠나가도록 통곡한다. 자식들의 백치병을 고치는 방법을 알게 된 그녀는 결국 자신의 골수와 뼈를 내어 다른 자식들에게 먹인다.

 

  그악스러운 생명 그대로의 모습으로

 

  몸서리치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이런 걸까.

  옌롄커의 글은 체제와 이념과 가난으로 상처 입은 자신의 고향 허난성을 떠나지도 않지만, 그 상처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땅과 노동, 생존과 욕망이 전부인 고향 사람들을 글의 소재로 삼지만, 그들을 대상화 하지 않는다. 식인과 수간이라는 금기 또한 다루지만 선정적인 용도로 이용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서럽고 억울하고 끔찍한 내 이야기를 좀 제발 들어 달라고 보채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마치 요우쓰댁이 골수를 내어 자식들에게 먹이듯, 자신의 삶과 재능을 갈아 넣어, 잊혀져가는 고향 사람들을 숭고하면서도 그악스러운 생명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려낸다. "문학의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예술의 본연으로 돌아가 모든 창조력을 쏟아 부은 작품을 남기려는 행위뿐이다." 그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아마도 작가로서의 "본연"을 잃지 않았기에 이런 글들이 가능한 것 아닐까.

 

  <골수>을 읽으면서 나는,소위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장엄하고 설득력 있는 서사가 될 수 있는 까닭이 뭘까 생각했다. 예롄커는 자신의 소설 기법을 "신실 주의"(神實主義)라는 신조어로 설명한다. '사실주의' 소설 기법으로는 중국의 해괴한 부조리를 형상화 할 수 없기에 현실과 환상, 기담을 넘나드는 신실주의 소설로 풍자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신실주의라는 기법이 아니러니하게도 중국의 현실을 묘사하기엔 가장 '사실적인'접근이 아닐까 생각했다.

 

  강요된 근대화와 속절없는 이념의 몰락과 급격한 자본주의화를 거치며 목숨과 명예를 빼앗긴 채 애도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수많은 혼령들과 공존해야 하는 중국의 현실 속에서 그 혼령들을 느끼지 못하고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못하는 글이 어떻게 '사실'을 담아 낼 수 있겠는가, 그의 글은 환상을 그려 내지만 현실을 놓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을 환상을 빌려 더 냉혹하게 그려낸다. <골수>의 마지막 부분처럼 말이다. 남편과 함께 혼령이 된 요우쓰댁의 이 한마디로 잔혹동화 같던 옌례커의 글을 "빛이 휙 하고 어둠으로 바뀌듯"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다. 빛과 대비될 때 어둠은 더 깊게 느껴진다.

 

  옌롄커와 아이리스 머독의 글쓰기

 

  우연찮게 옌롄커와 아이리스 머독의 소설들을 한주 차로 일고 각기 다른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 배웠다.

  우선 옌롄커의 <골수>을 처음 읽으면서 나는 그가 진정 무당의 기질과 재능을 타고난 작가들 중 한사람이구나 생각했었다. 마치 빙의를 하듯 자신도 모르게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완전히 몰입하여 글을 쓰는 매우 드문 천재들 말이다. 그런데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훈련이다. 소설 속에서 그는 작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집요하게 전지적 작가의 시점을 경계한다. 그이 소설 속 화자들은 다른 인물들을 관찰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고, 꿰뚫어 보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놀라고, 느끼고, 살아가고, 성장하고, 때로 절망한다. 작가로서의 오만한 시선과 방관자로서의 특권이 글에서 드러나는 것을 의식적으로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지독한 가난과 재해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고향땅 허난성의 인간들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경의와 겸손 덕에 이런 시점을 유지할 수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리스 머독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간 실존의 깊이와 진리를 향한 열망을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은 철학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은 스스로를 미화하고 기만하는 인간이 습성을 철학자의 분석보다 문학가의 주시(attintion)와 공감을 통해 훨씬 잘 드러난다. 문학을 읽을 때 비로소 인간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고, 타인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도덕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그래서인지 소설가로서의 머독은 철학자의 시선을 내려놓고, 욕망과 모순이 가득한 인물들, <바다여 바다여>에서의 찰스와 같이 징글맞은 인물이 되어 독자들과 눈을 맞춘다. 극단적으로 남성화된 화자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작가는 문학 속에서 완전히 죽어야 한다."고 모임을 끌어 주시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글쓰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을 죽이고 소설 속의 인물을 살려내는 희생제를 거행한다. 타고난 재능이든 치열한 훈련이든, 작가가 온전히 죽어야만 인물이 온전히 살아나고, 인물이 살아야만 글은 독자를 제단으로, 굿판으로 불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글을 통해 죽고 부활한다. 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글에서 창조한 인물들과, 독자들과 함께 살아난다.

 

  아마 나는 이것 때문에 -죽었다 살아나는 바로 이 주이상스(jouissance)*에 대한 매혹 때문에 창작에 대한 미련을 이제껏 품고 사나보다. 관찰자와 분석자의 시선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학술논문을 쓰면서는 경험하기 힘든 그 열락(悅樂) 말이다.

 

* 주이상스: 라킹은 주이상스를 일반적인 쾌락이 아니라 강렬한 성적 쾌락인 동시에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를 넘어서고 언어상징도 넘어서는 전복(顚覆)의 충동이라고 말한다. 향유,향락,희열의 의미를 포함하는 주이상스는 강렬한 쾌락이고 현실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결국 고통이 된다. 그런데 무의식에 잠재한 주이상스는 법과 제도를 파괴하여 처벌을 받더라도 금기를 깨고 싶어 한다.

전복(顚覆): 뒤집혀 엎어짐, 또는 뒤집어 엎음.

 

* 조민아 선생의 페이스북에 올린 개인적인 글을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게재용으로 편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