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2021년 겨울호

모든 2 2021. 12. 17. 09:03

세상에서 가장 낮은 거룩함

한상봉

 

  파주로 이사 와서, 고양이가 한 마리 더 늘었습니다. 개인주택이라서 마당을 들이고, 나무를 심고 꽃도 심었습니다. 그리고 길고양이를 위해서 주차장 한구석엔 사료와 물그릇을 놓아두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고가는 고양이들의 얼굴이 달라지는 걸 보면, 그 아이들도 역마살이 있거나 오래 살지 못하는 듯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갈아주면서, 너희도 행복해라, 마음을 더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털이 거친 삼색이 고양이 한 마리가 테크 위에 올라앉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다리도 절룩거리는 듯한데, 바깥에 나가보면 매번 눈을 맞추려 올려다보며 야옹거립니다. 사나흘 데크 위에서 집안을 기웃거리는 이 아이를 결국 동물병원에서 진료하고, 집안으로 들였습니다.

 

  집안에 고양이 네 마리, 집밖에 무수한 길고양이가 어정거립니다. 첫 번째 고양이는 제 딸아이가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주워온 것입니다. 새끼고양이는 참치캔 하나랑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입양된 고양이 두 마리는 부산 마리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소년의 집'에서 살던 청년이 셰프가 되고 싶다며 캐나다로 떠나면서 떠맡긴 녀석들입니다. 네 번째 입양된 아이는 '복동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두 주일 만에 털에서 윤기가 나고 기운이 살아나 펄쩍거리며 집안에서 뛰어다닙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집안에 들였으니, 그 녀석은 복이 많은 것이지요. 어떤 이유에서든지 제 삶에서 밀려난 아이들을 형편껏 보듬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다행한 일입니다.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샤를 드 푸코(1858~1916)는 하느님이 가나해지기 위하여 바닥으로 내려오셨다고 전합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끝자리를 선택하셨다고 합니다. 푸코의 영적 지도자였던 앙리 위블랭 신부는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가장 낮은 끝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아무도 그분보다 더 낮은 자리에 갈 수 없을 정도로..."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끝자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품어 안기 위해서라고 기스베르트 그레샤케는 <낮은 곳에 계신 주님>(분도, 2021)에서 말합니다.

 

by Saran Fuller

 

  "세상에 당신이 품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아무리 흉해도, 그것이 아무리 타락하고 망가졌더라도 기꺼이 당신 품에 안으십니다. 바로 여기에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품어주신다는 희망,여기에는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희망입니다. 작고 가난한 이들, 고통받고 굶주린이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여 소외되고 멸시받는 이들, 언뜻 봐도 세상에서 낮은 끝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과 하느님께서는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레샤케는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쇠렌 키르케고르가 들려준 이야기를 전합니다. 대단한 권력을 가진 왕이 너무도 가난하여 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여인이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다른 왕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고민합니다. 그녀를 뿌리로부터 바꾸어 놔야 할까? 아니면 요술을 부려서라도 그녀를 새로 태어나게 할까? 키르케고르는 "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여인이 높은 곳으로 올라올 수 없다면, 왕이 내려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성탄이 그런 것입니다. 마치 왕이 가난한 여인과 같아지는 것처럼, 하느님은 인간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피조물인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은 사건이지요.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전합니다.

 

"가장 낮은 존재라야 모든 이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가없는 사랑 때문에 진실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을 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자케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랐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캐오, 얼런 내려오시오."(루카 19,5) 예수님은 짧은 공생활이 있기 전에, 삼십 년 가까이 특별할 것도 없는 나자렛에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새롭고 놀라만 한 일이 없는 일상에서 거룩함을 맛보라는 초대입니다. 일상에서 사랑으로 성장한 사람만이 구세주가 될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하느님이 베푸신 놀라운 일의 표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이니, 이것이 곧 여러분은 위한 표징입니다."(2,12) 그 표징이란 게 정말 특별할 게 없습니다. 결국 천사들은 목동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너희의 일상으로 돌아가라! 일상에서 주님을 찾아라. 하느님의 영광은 너희의 작고 낮은 삶에 숨어 있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도 마리아처럼 그리스도를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일 신비가였떤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천 번을 태어나셔도, 정작 당신안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맬 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이스터 엑스카르트는 "성부께서 영원 속에서 당신 아들을 낳으신 방법 그대로,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당신 아들을 낳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리스도는 계속 탄생하는 것입니다. 개신교 신비가였던 게르하르크 테르슈테겐(1697~1769)의 글에 곡을 붙인 어는 성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랑스런운 임마누엘, 내 안에서 태어나소서.

   내 안에 거하시고, 당신과 하나가 되게 하소서.

  나를 사랑으로 부르시는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