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기는 교황 요한 23세
김경집
1958년 10월 9일 바티칸 콘클라베(교황 선출회의)에서 의외의 인물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신문은 새로운 교황의 가능성이 있는 추기경 20명을 뽑았는데 거기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당시 선거에 참가한 추기경은 모두 다 합쳐 51명에 불과했는데도, 게다가 나이도 76세나 되는 노인이었다. 모두 깜짝 놀랐다.
당시 프랑스의 타르티니 추기경이 가장 주목받는 유력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첫 콘클라베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은 베네치아의 대주교 안젤로 론칼리 추기경이었다. 과반을 획득한 사람이 없어서 여러 차례 재투표 끝에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이탈리아파와 프랑스파의 대립은 노골적이어서 자칫 추기경이 양분되어 교회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내부에서 커지고 있었고, 두 진영은 합의가 불가능하자 나이도 많고 야심도 없는 론칼리 추기경을 '쉬어가는 교황'으로 뽑았다. 그렇게 '징검다리 교황'이 된 분이 요한 23세 교황이다.
교황의 지혜와 용기
새로운 교황은 1958년 12월 23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했다. 이전까지는 추기경 수가 70명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요한 23세는 추기경의 수를 100명으로 확대했다. 그것은 식스토 5세 교황 때부터 400년 가깝게 이어진 관행이었기에 새로운 교황이 추기경의 수를 늘리는 것에 내부의 반발이 거셌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이제는 전 세계의 교회인데 어찌 유럽 출신 추기경만으로 세계 교회를 사목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가볍게 일축했다. 한국에서 추기경이 선출된 것도 이 덕분이었다.
다음 해 1월 25일 교황은 로마에 머물고 있는 추기경들을 바오로수도원에 초대했다. 대부분의 추기경들은 간단한 다과회나 만찬을 기대할 뿐이었는데 교황의 폭탄선언이 나왔다.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의회는 전 세계의 가톨릭 교구 지도자나 그들의 위임자 및 신학자들이 모여 합법적으로 교회의 신조와 원칙에 관한 문제를 의논, 정의, 결정하는 회의였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최고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교회사 전체에서 볼 때 공의회를 개최한 횟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추기경단은 깜짝 놀랐다. 딱히 공의회를 열어야 할 만큼 당면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공의회 개최는 현실적으로도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추기경과 대주교, 총 아빠스(수도원장) 등과 신학자들이 로마에 모여 긴 기간 머문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다. 그래서 특별히 시급한 일이나 교리와 신학의 심각한 도전이 없는 한 공의회를 여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그것도 '임시 교황'으로 불리던 교황의 선언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닷새 전 교황은 그 생각을 국무성 장관 타르티니 추기경에게 밝혔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탈락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차기 교황으로 점치던, 얼핏 보면 교황의 라이벌일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의외로 놀라기는 했지만 적극 찬성했다. 그는 직선적이고 이탈리아 추기경단과 대립적이기는 했지만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옆에 누가 있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교회는 당황했다. 어떤 추기경은 교황이 바티칸 경험이 없는 데다 충동적이어서 즉흥적으로 공의회 개최를 꺼냈을 거라거나 또 다른 추기경은 교황이 귀가 얇아서 남의 말에 휘둘린 탓이라며 어차피 교황의 나이나 지병으로 볼 때 시간을 끌면 공의회는 물 건너 갈 수 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결코 우발적으로 결정한 게 아니었다.
교황은 기존의 공의회가 하항식이었던 것을 완전히 뒤바꿔 공의회에서 무엇을 다루면 좋을지 세계의 모든 교구 주교들과 기관들에 설문을 보냈다. 어떤 주교들은 의제조차 없이 공의회를 개최하겠다는 것은 허구의 민낯이라며 빈정거렸지만 70퍼센트가량은 충실한 응답을 교황청에 보냈다. 사제의 결혼 허용 문제 등 상상도 하지 못할 짓들까지 두루 망라되었으며, 교황청은 이 답장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방식이었다.
교황의 공의회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보수적인 교황청관리들은 교황의 결심을 냉담하게 받아들였다. 공의회 뒤에는 늘 격변과 혼란이 따른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 상태에서 굳이 그 위험부담을 교회가 안아야 할 까닭이 없다고 여긴 탓이다. 전쟁도 끝났고 비오 12세의 인도로 교회가 성장해왔는데 갑자기 '이 노인네'가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 교황청 관료들은 공의회 개최를 지연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구상했다. 그 사이 교황이 서거하거나 마음이 바뀌어 스스로 포기할 수 있게 하는 게 그들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래서 요한 23세가 1963년에 공의회를 개회하겠다고 하자 너무 빠르다고 응수했다. 그러자 교황은 오히려 개최 일정을 한 해 앞당겨 1962년 공식적으로 공의회를 소집했다. 반발하는 추기경과 주교들에게는 "공의회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 역사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모여 분열을 끝내기 위한 것입니다"라며 관철시켰다. 그렇게 1962년 10월 11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다행히 요한 23세는 공의회 첫 회의를 주재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았다. 비록 폐막과 선언까지는 그의 몫이 되지 못했지만.
거듭된 파격,그러나 희망이 되다
요한 23세는 이전 공의회와 달리 일반 사제들과 여러 분야의 전문가 평신도들까지 초청했는데 공의회에 참석한 신부들에게 회의에 늘 긍정적인 태도로 임하겠다는 서약을 받았고 어떠한 정죄나 저주, 정치적 적대행위도 무시할 것이며 교회가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인류의 종이라는 점을 깨우쳐주겠다고 서약했다. 게다가 기존의 교리를 재검토하고 시대착오적인 것들은 고치되 새로운 교리는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기존의 공의회에서는 보지 못한 혁명적인 모습이었다. 공의회는 과거의 적대행위를 청산하고, 교회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며, 그리스도교의 일치된 모습을 추구하겠다고 천명했다.
요한 23세는 과거의 낡은 인습과 관행을 거부했다. 그는 권위적인 모습을 없애고 사람들에게 허물없이 다가갔다. 유머감각도 뛰어난 그는 아동병원과 교도소를 방문했다. 보수적인 바티칸 관리들은 기겁했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의 위로와 축복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고 가야 한다는 신념을 관절 시켰다. 그 방문은 교황청을 잃은 뒤 교황이 처음으로 바티칸을 벗어난 행차였다. 그는 소탈하고 어떠한 차별도 거부하며 친근하게 다가갔다. 그런 교황을 본 적이 없는 교회는 한편에서는 환호하고 한편에서는 당혹했다. 이들의 당혹감은 곧 이어진 공의회에서 전 세계 각지의 가톨릭 주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현장의 목소리를 쏟아내었을 때, 다시 한번 교황청 관료들의 충격으로 이어졌다.
요한 23세는 짧은 재임기간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극심해졌던 시기로 쿠바 미사일 사태로 핵전쟁의 위협까지 들먹일 때였고, 아시아-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가 출현하고,베트남 전쟁의 암운이 드리웠으며, 학생혁명과 남녀평등 등의 요구가 확산되기 시작한 격변의 시대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배치 문제로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을 때 요한 23세는 흐루쇼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교황이 나서자 무신론자인 흐루쇼프도 마음을 조금 열였다. 양국이 양보할 것을 권유하는 교황의 전화에 흐루쇼프는 미국이 양보하면 소련도 양보하겠다며 조건부로 수락했다. 교황은 그 대화 뒤에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에게도 양보를 권유했다. 그러면서 미소 양측에 은밀히 소련의 핵미사일 쿠바 배치와 미국의 해상 봉쇄에 관한 '동시 철수'라는 중재안을 제시하여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요한 23세는 나중에 흐루쇼프 딸 부부를 교황청에서 알현한 일도 있었다. 교황청 관리들은 종교를 탄압하는 공산주의 소련 지도자의 딸은 교황을 만날 자격이 없다고 반발했지만 교황은 어떤 차별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부부를 맞이했다.
먼저 용서를 청하는 것이 용기다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개최하기 전인 1959년 6월 회칙에서 "베드로 죄를 향하여 갈라져 나간 우리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다음해 6월 교회일치와 대화를 위한 기구인'그리스도교 일치촉진사무국'을 설립했다. 그의 교회일치운동은 보수적인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거센 반발을 받았다. 그러나 교황은 굴복하지 않았다. 1960년 12월에 영국 성공회의 대표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바티칸으로 초청했다. 교황청 관료들이 그의 방문을 워낙 거 세계 반대하자 교황은 대주교를 밤에 바티칸으로 불러 만났다. 역사적인 해후였다. 그리고 다음에 6월에는 동방정교회 아테나고라스 1세 총대주교에게 사절을 보냈고, 유대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요한 23세는 다른 교회의 종교지도자들을 정중하고 극진하게 맞았고 그들에게 공의회에 참관인들을 파견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들은 교황의 태도에 깜짝 놀랐다. 교황은 공의회 전까지 공식 전례문에서 사용하던,유대인들을 저주하는 특정한 문구도 삭제했고, 유대인 방문객들을 맞을 때 자신을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말로만 그친 게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요한 23세는 가톨릭교회의 내부뿐 아니라 격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보수파들의 집요한 반대와 방해공작을 뿌리치고 마침내 1962년 10월 11일 역사적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다. 교회사에서 가장 모법적인 공의회는 그렇게 열렸다. 공의회가 열린 지 60년이 지났는데, 우리 교회는 그 공의회 정신을 얼마나 실천했을까? 요한 23세 교황과 공의회를 기억하는 교회인가? 다시 요한 23세 교황을 호출하면서 여전히 완고한 한국교회를 생각하니, 슬픔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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