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핵,포기하지 않는 것이 희망이다
정수희 활동가(부산에너지정의행동)
장영식
부산에너지정의행동 정수희 활동가를 만났습니다. 정수희 씨는 핵발전소가 가장 많이 있는 부산에서 일찍부터 반핵 활동에 투신했습니다. 정수희 씨는 경북 고령 출신으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고령에서 보냈습니다. 중학교 때,교회에서 갔던 연합수련회에서 "지금은 이름을 알 수 없지만,대구에서 오신 교수님이 보여주신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와 체르노빌 아이들이 피폭된 사진들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이때 처음 반핵 교육을 받은 셈입니다.
그녀는 양산에 있는 경남외고에 다녔습니다. 그때 같은 반에 서생에서 온 학생들이 서너 명 있었습니다. 지금도 간혹 그 친구들과 만나거나 통화를 할 때,"너는 서생에 없는데,내가 서생을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부산대학교 사회학과에 다니던 1998년에 서생으로 '환경현장활동'을 갔습니다. 그 당시의 서생에는 신고리핵발전소 1-2호기 건설이 확정되었고, 신고리핵발전소 3-4호기 건설이 계획되던 시점이었습니다. 신고리핵발전소 3-4호기는 서생 주민들의 반대하는데도 울주군 군수가 유치신청을 해서 주민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정수희 활동가에게 문재인 정부를 평가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이는"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대보다는 걱정이 컸었다."고 말합니다. "그 동안 탈핵 싸움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고 긍정적인 경험을 해보지 못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탈핵을 말할 때,시민사회 단체들이 '협치'라는 이름으로 포섭될까봐 두려웠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노무현 정부 때 있었떤 부안과 경주 방폐장 주민투표를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탈핵 약속에 대한 시민사회 단체의 강한 견제와 견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던 시점에,이른바 민주정부라는 이름 아래 '탈핵이 가능할까'라는 걱정과 우려가 많았던 것입니다.
정수희 활동가가 "대한민국 방방곡곡 가져가라 핵폐기물" 캠페인단과 함께 모형 쓰레기통을 놓고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려는데 경찰에게 제지당하자 항의하고 있다.
2017년 반핵영화제의 주제는<탈핵의 약속>이었다. 정수희 활동가는 문제인 정부의 출범에 대한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반핵영화제는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를 계기로 핵무기 피해자 고 김형률 씨 추모제 일환으로 시작되어 올해 10회째 진행될 예정이다.
탈핵 진영에서 가장 뼈아팠던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 건설 여부를 묻는 공론화 과정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정수희 활동가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던 '탈핵'을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의미가 컸습니다. 공론화는 대통령이 탈핵 약속을 지킨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 여론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그러나 "사회변혁운동 과정에서 탈핵 의제는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탄핵과 대선으로 이어지는 급격한 흐름 안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즉 시민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들의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 약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역량이 부족했습니다."라며 시민사회의 부족했떤 부분들과 낭만적이었던 분위기를 진소랗게 전했습니다.
공론화 과정은 대통령의 탈핵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절차'라는 시각이 있었지만,한편으로는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에 대한 백지화 약속을 무효화 하기 위한 기만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대립되는 시각들이 활발한 논쟁을 통해 결론를 내기도 전에 공론화 국면으로 흡수되어 버렸습니다. 시민사회 단체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공론화를 거부하자.'라는 여론도 있었지만,묻혀 버렸습니다. 정수희 활동가는 "우리가 원한 게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했고,혼란도 있었습니다. 공론화에 대응하는 역량과 자원이 부족했습니다. 그 한계가 드러나면서 실패뿐만 아니라 탈핵 진영이 와해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역량이 부족했던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정수희 활동가는 최근 핵폐기물 문제를 확산하기 위해 "대한민국 방방곡곡 가져가라 핵폐기물"캠페인단과 함께 모형 핵드럼통을 싣고 핵발전소가 있는 지역을 거쳐 서울 과와문과 청와대까지 9박 10일간의 여정을 준비하면서 핵폐기물 문제가 주요 의제였다고 합니다. 그때 '서울로 들로 가자''서울로 보내자'라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핵발전소가 하나도 없는 서울이 핵폐기물 문제에도 책임의식이 없다는 인식이 컸습니다. 캠페인단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사용후핵연료 관리정책과 재검토위원회 해체,그리고 청와대의 책임을 요구했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정수희 활동가에게 '탈핵 활동가들의 희망'을 물었습니다. 그이는 솔직하게 "희망은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저 탈핵 현장의 과제는 "버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질긴 놈이 이긴다.'는 말처럼 "포기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투쟁 현장에서 밀양 할매가 '공주'라고 불렀습니다. 부모가 지어준 귀한 이름을 너무 쉽게 '수희야'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것이 할매는 안타까웠다고 합니다. 지금 그이는 입양한 세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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