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완전히 달라진 나,<빅이슈>를 구매하며

모든 2 2020. 12. 20. 14:56

 

완전히 달라진 나,<빅이슈>를 구매하며

최태선

 

 

  노량진 전철역 앞을 지날 때에는 '빅판'을 찾습니다. 장사가 잘 안 되는지 최근 몇 달간 '빅판'을 보지 못했습니다. 몇 년 동안 여러번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아주 젊은 분이었는데 보이질 않습니다. 낙관적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코로나로 사람들이 어려워지면 이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장사가 더 잘되는 곳을 찾아갔거나 장사를 포기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제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빅이슈>(The Big Issue,홈리스를 지원하기 위해 발행되는 거리신문)와 그것을 파는 '빅판'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그리많지 않습니다. '빅판'은 거리에서 <빅이슈>를 판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 특히 처음 만날 때는 <빅이슈>를 사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줍니다. 선물이 아니라 교과서입니다. 그러나 저를 통해<빅이슈>를 사게 되었다고 말하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처음<빅이슈>를 드린 사람에게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빅이슈>를 드려봅니다. 만일 <빅이슈>를 자신이 한 번이라도 샀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대해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빅이슈>를 알게 된 후 그것을 산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은 불쾌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따위로 자신을 시험하려 드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 때 그것을 반성하고 다음에는 꼭 한 번이라도 사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까짓 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빅이슈>를 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은 제가 쓴 글이 못마땅할 때에는 꼭 그러는 당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사실 그런 질문에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은 참담한 일입니다. 자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하느님 나라의 일을 하고 있다는 자의식 자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삶의 방식이고 그것이 일상이 되어 자신이 그런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는 의식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빅이슈>와 빅판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사실은 하느님 나라 운동의 기초를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빅이유>를 정기적으로 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는 사람은 먼저 그런 일이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노숙자 선생님들에게 식사를 한 끼 대접하는 일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일

 

  며칠 전에는 머리를 깎으러 종로상가엘 갔다가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다리를 절며 도와달라고 외치며 다니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너무 빨리 지나갔기 때문에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다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나갔던 그가 다시 돌아오며 같은 소리를 외쳤습니다. 얼른 돈을 꺼내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그에게 주었습니다. 오천 원짜리였습니다. 그는 그 돈을 보고 완전히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껌 한통을 꺼내 이거라도 받으시라고 말했습니다. 괜찮다고 그냥 가지시면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의 환한 얼굴을 보고 저도 환하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습관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일상이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의 중요성을 늘 사람들에게 일깨워줍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한 때에,하느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제게 그러는 당신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은 제가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그서것이 하느님 나라 운동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고 인정하려 들지도 않습니다. 하찮은 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 본인에게는 가히 결정적이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처럼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하느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이 말씀은 단순한 상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부자와 거지의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일이지만 저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하고 있다고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게는 하고 싶지만 아직 하지 못하는 하느님 나라의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해내는 공동체

 

  "바울은 이에는 이,눈에는 눈'도,분배도 아니라 하느님의 거룩한 관용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정의에 대해서 상상했다. 그는 하느님의 관용에 사로집히며 우리도 그런 관용을 드러낼 존재가 되리라고,그리스도가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용서한 것처럼 똑갚이 된다고 확신했는데,이건 확신이라고 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바울은 단순히 정의를 구현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 사상가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낸 운동가였다. 당신 조그만한 커뮤니티(들)를 만들었다. 커뮤니티마다 관용을 나누는 사람들이 되라고 했으며,그것을 통해 하느님이 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확신이 있던 사람이다. 따라서 바울의 사상은 절대 한 개인을 목적으로 두지 않으며,한 개인의 칭의를 말한적이 없다. 커뮤니티로서 그것을 실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행동한 사람이 바울이다."

 

  제가 꿈꾸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내고 실현해낼 수 있는 공동체의 설립입니다. 그래서 테드 제닝스의 바울 이해를 볼 때에 제 마음에 불이 타오릅니다. 제닝스를 거룩한 관용과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하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확신을 가지고 그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영혼구원'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하느님이 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집단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한 이 일이 바로 하느님 나라 운동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원하시던 대안사회로서의 하느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이 일은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제가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이 저를 그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주님이 저를 사용하실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사람들은 제게 하느님 나라를 위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질문하면서 저를 빈정거리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 빈정거림과 무시를 당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테드 제닝스의 말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에일리의 노래 가사처럼 '완전히 달라진 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의 일상이 달라져야 합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의 VIP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관용은 그렇게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품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야 경제로부터 벗어난 선물인 은혜를 경험하고 알게 됩니다. 부채의식에서 벗어난 의무를 배우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하느님의 관용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구현해내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제 마음에서 불타는 이 열정은 저를 힘들게 합니다. 점점 더 냉랭해지고 잔인해지는 세상을 바라보며,그것을 인식조차 못하고 자기 생존애만 연연하기 때문에 또 다시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교회를 바라보며 애통해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작은 자들의 나라입니다. 큰 것을 내게 보이라고 말하는 자신을 보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갚을 수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사람을 보시면 그 사람과 함께 조그마한 커뮤니티를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불관용을 절대 관용하지 마십시오. 갚을 수 없는 사람을 초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관용의 시작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