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일꾼 CATHOLIC WORKER

어떻게 해야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모든 2 2020. 6. 21. 18:49

어떻게 해야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

조기동

 

신앙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전인적인 응답입니다. 온전히 그분을 믿고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은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11,1)우리는 감옥에 갇힌 춘향이와 같습니다. 결과를 알았을 때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춘향이처럼 오직 이몽룡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불확실성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나는 천주교 신자입니다.""하고 말할 때,나는 지성으로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나에게 여전히 신비이지만 당신을 향하여 저를 결단하고 저를 맡깁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6)그래서 신앙인은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고 '신앙의 복종'을 선택합니다.

 

하느님 나라

 

  우리의 신앙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려고 온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막연하게 '나를 편히 쉬게 해주는 곳''이상향'으로 생각합니다. 감성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뿐 예수님이 선포하신 그대로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짚어내는 사람이 드뭅니다.

 

  "행복하여라,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6,29)"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정말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합니까?그렇다면 부유한 사람들이 지금 불행합니까? 예수님께서 원래 말씀하시고자 했던 행복선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간적,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중에서도 이사야서에서 그 개념을 뽑았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은 자비와 정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우리들이 훌륭한 임금이라고 할 때,그 임금이 얼마나 영화를 누렸는가에 따라 평가하지 않고,그 임금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얼마나 자비와 사랑으로 대했느냐?하는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상소가 빗발치듯했습니다. "문화민족은 대국의 글자를 써야합니다. 오랑캐들이나 자기네 나라의 글자를 갖는 것입니다."라고요. 세종대왕은 한글창제 외에도 백성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하느님은 가장 이상적인 임금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과부,고아,외국인들의 권위를 찾아주셨고, 그들 편에 계셨습니다. 부모는 자식들 중에서 약한 자식을 특별히 돌봐줍니다. 못난 임금들은 세도가들과 결탁하고,가난한 백성들을 착취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어렵게 사는 백성에게 특별한 애정을 기울이십니다.

  하느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다 갖추신 분이십니다. 그 권능과 부를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 다 쏟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구유에서 태어나셨고,그 탄생소식도 목동들에게 알리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창세기부터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하느님이 임금으로서 가장 고통 받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선정,그 자비가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다스림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엄정한 정의와 질서의 체계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각자가 들인 노력에 따라 쟁취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닙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선두주자나 꼴찌,의인이나 죄인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침 9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 5시 온 사람에게 하루 일당을 똑같이 주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인간적 가치 기준이 별로 큰 의미가 없습니다. 가치,곧 하늘나라에서의 위치는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받아들임으로 측정됩니다. 중요한 것은,보수나 노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누구나 포도밭으로 부르는 주인의 무조건적인 초대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스스로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까지도 다 포함합니다. 소위 의인들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장벽은,죄인들로 하여금 지금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접근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비유 속에는 이제껏 잘못 자리매김한 죄인들과 하느님 사이,의인들과 하느님 사이를 바로잡기 위한 평탄 작업이 엿보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과 그분의 메시지 앞에서 동등한 자격을 지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세워 놓은 윤리적 장벽이나 한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을 위한 축복을 하느님께 요구할 권리도,다른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려 달라고 요청할 권리도 없습니다.! 죄인에게 무서운 재앙이 닥치리라고 선포하는 신흥종교의 묵시문학적 설교는 결코 그리스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마태5,45)아버지이십니다. 구원은 모든 인간을 하늘나라의 가치로 애써 불러 모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얼마나 흔쾌히 응답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이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난 자체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들을 특별히 눈여겨보시니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윤리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by Martun Erspamer OSB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마귀 들린 사람들,병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하느님이 뚫고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당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어디 의지할 데 없어서 가상적인 것을 만들어 놓고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믿습니다. 성당에는 나이 들어서 힘 없어지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힘 있을 때 하느님을 만날 생각은 안 하는 거지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만 알면 삶이 달라집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묵주기도를 아무리 해도,별스런 신심행위를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려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유를 제대로 못 알아듣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루카복음 15장 되찾은 양의 비유,되찾은 은전의 비유,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전에 쓰던 '탕자의 비유'라는 제목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라고 하면 죄인의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비유의 주인공은 두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어떤 자리에서 말씀하셨고 그 대상은 누구일까? 루카가 설정한 이 비유의 주변 환경과 청중은 루카 15,1-2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렸다."(루카15,1)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마을에,점젆은 노인 한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큰 아들은 모범생이었고 작은 아들은 망나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기왕이면 살아계실 때 재산을 물려주시지요.무덤 속에서는 제가 감사하는 모습도 보실 수 없지 않습니까?"..아들이 18세가 되자마자 청하니 놀랍게도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줍니다. 당시 큰 아들은 다른 아들의 두 배로 유산을 받았습니다. 두 아들이 있었으니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의 삼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유산은 땅이었습니다. 소유권이 자식에게 넘어가더라도 처분권은 없었는데,작은 아들은 처분권까지 행사하고 띠로 시존 지방으로 갑니다. "나는 시골구석에 쳐박혀 있을 사람이 아니지"..그리고 재산을 탕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돼지를 먹지도 키우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돼지 키우는 일을 합니다. 작은 아들은 자신이 믿던 종교까지 포기해 버리고 돼지 키우는 머슴이 됩니다. 쥐엄나무 열매를 먹다가 작은 아들은 정신이 번쩍 들게 됩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떠나니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했을까요? "이놈,호적에서 이름 빼버리고 다시는 안 봐야겠다."라고 했을까요?아닙니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재산을 달라고 하니 '물려달라고 조르니,내 그늘에서 있어봐야 사람 구실 못할 것 같다. 거지꼴이 된다고 하더라고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해보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재산을 물려줬는데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얘가 사업을 하다가 잘못되면 어떡하지???...아버지는 밤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동구 밖에서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집 떠난 작은 아들 걱정에 침식을 잊으니 집안 분위기가 초상집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가 동네로 들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저런 거지꼴로 들어올 놈은 내 아들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당시에 지체 높은 사람들은 절대 뛰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뛰어가서 입을 맞춥니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용서의 표시입니다. "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성경에 되어 있지만,원문에는 "죄를 지었으니"라는 말로 끝납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막은 것입니다.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아버지는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당시 제일 좋은 옷은 아마포 속옷이었습니다. 그것은 훈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반지까지 끼워줍니다. 반지는 인장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끼고 있던 반지를 끼워주고,가죽신을 신깁니다. 송아지까지 잡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이 죄인의 회개라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안 끝나고 큰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큰 아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또 큰 아들을 달래러 나옵니다. 원래 성경에는 큰 아들이 "아버지"라는 칭호도 쓰지 않고 항의합니다. "아버지,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군요."원문에는 '당신의 삶을 먹어치운 저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가 젊을 적부터 일해서 모은 재산이니 그걸 먹어치운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삶을 먹어치운 겁니다. 큰 아들은 "당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큰 아들은 동생이 떠나는 순간부터 동생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겁니다. 아버지가 타이릅니다. "네 동생은,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라고 끝납니다. (니 동생이잖냐? 어릴적 생각해 봐라.)

 

  탕자의 비유의 초점은 세가지입니다.

  첫째,너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선벌악의 하느님이라는 이미지는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거라는 지적입니다. '네가 내 재산에만 눈독을 들이는구나.그래 갖고 가 봐라. 재산 갖고 진창에서 뒹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재산을 줘 놓고도 노심초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세리,죄인,창녀들을 끌어안고,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 것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두 번째, 너희는 큰 아들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큰 아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아버지 재산을 보고 "저는 파렴치하게 공짜로 재산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어요. 대가를 지불하겠어요. 재산이 많으니 종처럼 일해야겠네요."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장사속이 아닙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구원은 율법을 지켜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도  무한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공로는 유한합니다. 우리들 공로의 많고 적음은 무한한 하느님 앞에서는 종잇장 한 장 차이입니다. 하느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큰 아들과 아버지와의 장벽은 '공로를 쌓는 것'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한 번도 헤아려보지 못했습니다.

  또 작은 아들은 아버지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순간에 참회했을 겁니다. 돼지우리에서는 후회를 했지 참회를 한 것은 아닙니다. 후회와 참회는 다릅니다. 후회는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면서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이고,참회는 하느님의 사랑을,하느님의 마음을 손상시켰다고 깨닫는 것입니다.

  세 번째 초점은,너희는 죄인들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앓고 있는 병자입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입니다. 그들의 처지가 딱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는데 너희도 그런 연민의 정을 가질 수가 없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려주고,그 분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그분 사랑을 받아들이라고,그리고 같은 처지의 어려운 이웃을 이해해 주라고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호소였습니다.그들이 그 비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더 이상 희망이 없겠지요. 하느님은 잘 되든 못 되든 자식의 행복을 원합니다. 하느님은 자식이 잘못돌수록 그들에게 매달립니다. 부모들은 말합니다. "자식은 내 맘대로 할 수도 없고,내 맘대로 해서도 안 되지만,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라고요.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 하느님만 제대로 이해해도 신앙생활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비유 앞에서 다룬 양의 비유와 은전의 비유를 더불어 보면서,세 비유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은,잃은 자를 찾은 기쁨과 이 기쁨으로의 초대입니다. 예수께서는 비유의 이야기들을 통하여,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어떤 인간적인 노력으로도 맞바꿀 수 없는 동시에 어떤 인간적 실패로도 제한될 수 없음을 천명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노예의 신분이 아니라 자녀의 신분으로 자유롭게 나서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시며 우리의 어머니요 아버지이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채,자신의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 당신의 따뜻한 품 안으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십니다. 죄인의 진정한 회개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만나는 데서 출발합니다. 허나,회개를 촉구하는 교회 내의 설교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총에 바탕을 두기보다 인간의 단순한 참회와 윤리적 노력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호소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그 분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지 깨달아라!죄인들의 딱한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며,그들이 아직도 '네 형제자매'임을 잊지 말아라! 네 형제자매가 제 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거든 걱정해주고,그들이 돌아오거든 진심으로 환영하여라!무엇보다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우를 범하지 말고,스스로 노예로 전략하여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by Sarah Fuller

 

주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은 결국 개인의 차원에서 볼 때는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맞이할 때,우리는 하느님께 다가가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며,죽음과 더불어 이승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허리에 띠를 두르고 등불을 밝혀놓은 채,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기다리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통하여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찾아 오시는 주님께 기꺼이 봉사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과 책임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휴거론자들처럼 하늘로부터의 이변이 일어날 날짜나 계산하고 고대하는 허황된 태도를 버리고, 현실 안에서 우리가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루하루 성실하게 다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선행과 공로를 자랑삼거나 그것들을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받는 수단으로 삼아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과 맞바꾸려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서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그 자체로 보람과 기쁨을 삼아야 합니다. 종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 하고,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드높이려 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성직자와 수도자,또는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나선 그리스도인들이,자신의 일을 다 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상을 받거나 남들로부터 찬사나 존경을 받는 일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습니다. 더구나 그런 상이나 찬사가 명예를 은근히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보다 우스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런 생각을 지닌 충직한 종에게 상급을 주시고 안주시고는 하느님 소관이며,그분께서 어떤 상급을 언제 어떻게 내리실지는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비록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충직한 종을 만난 주인이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를 그에게 내리시는지 밝히심으로써,늘 깨어 기다리며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얼마나 더 큰 상을 주실 것인지 암시하고 계신다 해도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과 자세는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1. 현장 중심 : 경험을 통해 현실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위나 성전 안에 머물지 않으시고 사회의 약자들과 어울려 사셨기에 그들의 삶의 처지를 잘 아셨고 그들의 아픔과 바람이 무엇인지도 잘 아셨습니다.

  2. 변화 중심 : 참된 신앙은 결코 안락하거나 완전히 개인적일 수 없는 것이어서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며 이 지구를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3. 가난한 이 중심 : 가장 가난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보잘것 없는 이들을 부드러운 사랑으로 끌어안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4. 행동 중심 : 토론은 짧고 행동은 빨라야 합니다. 수백만명의 아이들이 굶주리는데도 차를 마시며 고상하게 신학을 토론하는 신자들이 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고 우리의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 좋아집니다.

  5. 정치에 대한 관심 :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의무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합니다.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합니다.

  6. 미사와 묵주기도 중심 : 미사와 묵주기도는 영적 투쟁의 차원을 지니고 있으며 악과 그 공범자들과 싸우는데 힘을 주고 그 싸움에서 우리를 지원합니다. 나약해졌다고 느끼면 평일 미사에 참례하고 온종일 묵주기도를 하십시오.

 7. 예수님 중심 :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조직과 함께하고 그 어떤 좋은 것들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결국 우리가 이웃에게 매력이 넘치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매력적인 인격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데 앞장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