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3) 깨달음

모든 2 2019. 4. 16. 02:55



아테네는 서사시와 비극으로 대중을 교육시켜…이야기 전달 방식의 비극은 기원전 5세기에 등장했죠



베니에 가네로(1756~1795)의 ‘장님 오이디푸스와 자녀들’(1784년, 유화). 스웨덴 스톡홀름 국립박물관 소장.



  인간은 오감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배우고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을 ‘깨닫는다’라고 표현한다. ‘깨달음’이란 자신도 모르게 옹고집처럼 감싸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깨는 활동이다. 내가 스스로 의도적이고 정기적으로 깨침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나는 점점 더 ‘자기’라는 수렁에 빠져 나도 모르게 이기적이며 무식한 인간으로 변할 것이다.



이야기

  인간은 특히 눈을 통한 보기와 귀를 통한 듣기로 배운다. 눈을 통해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장면을 경험할 때 배운다. 동서고금의 고전이나 경전들은 주위에서 언제나 우리의 눈을 기다린다. 우리의 눈은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 중독과 충성을 요구하는 게임에 익숙해져 있다. 이런 유혹의 특징은 끝과 만족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백 수천 년 동안 우주에서 가장 혹독한 심판자인 시간이란 괴물의 검증을 받은 고전과 경전은 소중한 것을 선물한다. 이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깨달음의 수단으로 여기려는 사람들에겐 중독이 아니라 만족을 선사한다. 만족은 나의 충성을 애타게 요구하지 않지만 나의 의식을 확장해 취미를 선물한다. 고상한 취미를 지닌 자가 문명인이며 문화인이다.


  인류는 아마도 기원전 3만2000년께부터 다른 동물들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인간만의 취미를 가졌다. 이 취미가 인간을 유인원과 구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다. 인류의 조상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태곳적 천지가 요동치면서 만들어진 지하 동굴로 내려가 자신들의 오감을 자극해 오래된 자신을 깨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했다. 그들 중 가장 용맹한 사냥꾼이 사냥하면서 만난 거대한 들소나 야생사슴에 관한 생생한 이야기를 동굴 안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동료들에게 감동적으로 말했다. 몇몇은 이 이야기를 동굴 벽에 웅장하게 그렸다. 거대한 동물을 사냥한 경험을 들은 현생 인류는 더 이상 과거의 인간이 아니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자신이라는 개인으로부터 탈출해 공동체 일원이 된다. 이 과정이 ‘엑스터시(ecstasy)’다. 즉 자신의 현재 상태(-stasy)로부터 밖으로(ec-) 빠져나오는 황홀경(恍惚境)을 체험한다.


서사시(敍事詩)와 비극(悲劇)

  기원전 5세기, 아테네는 두 가지를 이용해 대중을 교육시켰다. 서사시와 비극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으로 대표되는 창작의 기본구조와 성격을 규정한 《시학(詩學)》 26장에서 서사시와 비극을 비교한다. 둘 다 이야기를 매개로 의미를 전달한다. 둘 중 무엇이 더 우수한 예술형식인가? 그는 그리스의 대표적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비극시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비교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사시는 가지고 있으나 비극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비극은 심지어 (서사시 형식인) 장단단육보격(長短短六步格) 형식을 사용합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는 기원전 750년부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서사시로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야기의 보루였다.

  기원전 5세기에 이야기 전달 방식의 새로운 스타일인 비극이 등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비극은 많은 부분을 무대장치와 음악에 할애해 쾌락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이 생생함은 대사나 행위를 통해 관객에게 느껴집니다. 비극은 자신이 표현하려는 이야기의 재현을 제한된 공간에서 성취합니다. 그 쾌락은 (서사시처럼) 장시간에 걸쳐 희석되지 않고 좀 더 집중돼 강화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렉스》를 《일리아스》와 같이 많은 행으로 늘린다고!”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동굴 속 의례는 지상으로 옮겨져 처음에는 서사시 형태로 시작했다. 서사시는 가족 중심, 혈연 중심, 혹은 지역 중심의 오래된 소통 방식이다. 수직적이며 일방적인 방식을 통해 전달되는 서사시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의 소통 방식으로는 부족했다. 이야기가 수평적이며 상호보완적인 방식으로 거듭나기 위해 무대장치와 의상, 그리고 음악을 동반한 비극이 등장했다.

  공동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도시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거주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비극이란 새로운 이야기 장르를 고안해 냈다. 종합예술인 비극은 시와 음악, 춤과 웅변, 무대장치와 무대의상으로 원형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의 눈과 귀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자극했다.



■기억해주세요

공동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 도시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거주하는 아테네 시민들은 비극이란 새로운 이야기 장르를 고안해 냈다. 종합예술인 비극은 시와 음악, 춤과 웅변, 무대장치와 무대의상으로 원형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의 눈과 귀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