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예수의 힘
한 순간에 저렇게 무너질 수도 있네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이. 삶과 죽음이 예있습니다. 일본 대지진 현장, 화면만으로도 맥을 풀리네요. 아무쪼록 저들이 저 재앙 속에서도 기꺼이 살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또 놀란 것은 그렇게 엄청난 지진으로 완전히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망연한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안 믿어서 그런 불행이 닥친 거라고 헛소리를 하는 목사님들이었습니다. 소름끼쳤습니다. 그 소름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을 안 믿어서 그렇게 고통스러운 십자가형을 받았던 거냐고. 고통에 대한 감수성 없이 십자가 앞에 설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이번 주는 십자가 고통의 의미를 명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렘브란트는 예수의 십자가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저 그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렘브란트는 이미 죽은 예수의 시신을 밝고 고요하게 처리했습니다. 시신이라기보다는 온 힘을 다해 지킬 가치가 있는 빛나는 보석 같지 않나요? 피안에 든 듯 고요한 예수를 연인을 보듬듯, 보물을 다루듯 내려앉는 저 남자는 복음서에 나오는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형을 반대했던 의원이었고, 자기를 위해 준비했던 무덤을 예수에게 내주었던 부자였습니다.
요셉 아래서 예수를 떠받칠 준비를 하고 있는 흰 수염의 노인이 보이지요. 그가 니고데모입니다. 그 역시 예수를 만나 삶이 바뀐 남자였지요. 사다리 오른쪽에서 예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맑은 남자, 그 남자가 늘상 ‘예수가 사랑한 제자’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요한입니다.
렘브란트 반 레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1634, 캔버스에 유채,
158×117㎝,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 보면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여인이 있지요. 실성한 듯 비탄에 잠긴 여인, 마리아입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봐야 했던 여인,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순간을 살고 있는 그 여인이 맥을 놓지 않고 어찌 저 순간을 견디겠습니까.
평소 여인들을 배제하지 않으셨던 예수의 마지막답게 여인들이 보입니다. 끝까지 예수와 함께 했던 여인 중엔 얼굴을 감싸고 우는 여인도 있고, 슬픔의 힘을 옮겨 자리를 정리하는 여인도 있습니다.
그 여인들이 준비하는 예수 누울 자리가 보이지요. 고요한 예수와 어울리지 않습니까. 죽은 예수는 표정이 없다기보다 평온하고, 예수 누울 자리는 아늑해 보입니다. 우리나라 대형교회 예배당에서 성대하게 준비된 고난주간의 화려한 예배가 정말 최소한의 것으로 간솔하게 예수를 모신 저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결을 어찌 따라가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참담한 사건입니다. 처참하게 버려지면서도 예수는 억울하게 죽는 거 알기냐 하느냐며 항변하지도 않았고, 너희를 위해 죽는 거라고, 나를 알아달라고 호소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신의 각본 속에 들어있는 주연배우로 내세운 적도 없습니다. 십자가형이라는 어마어마한 고통 앞에서 동요하지도 않았고, 의기소침해져 우왕좌왕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는 저 기막히게 불행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조용히,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는 거라고 기도하기만 했습니다. 저 그림은 그 엄청난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불행의 강을 건너고 침착하게 고통의 산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자의 최후답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버림받은 인간의 원형이 있습니다. 버림받음은 인간의 보편적 문제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배우자에게서, 연인에게서, 직장에서, 자식에게서, 부모에게서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차적으로 가져야 하는 태도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예수의 힘이었습니다. 그 힘으로 예수는 고통을 없앤 것이 아니라 고통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배운 게 있습니다. 어쩌면 불행은 나쁜 게 아닐지도 모르고 고통은 해로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는 적어도, 고통을, 슬픔을, 불행을 모르게 해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라 우리가 슬픔을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슬픔을 잘 겪어낼 수 있는 사람이기를 기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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