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허영이 낄 틈 없는 ‘온전한 밥상’
‘감자 먹는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저 그림이 무서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손이 싫었습니다. 울퉁불퉁 깡마른 농부의 손이. 얼마나 일을 하면 저렇게 될까, 얼마나 가난하면 저렇게 될까? 이상하게 그 그림이 생각난 것은 시끄럽고 소란한 인도의 바라나시에서였습니다. 나는 시바신 앞에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사람들이 무서웠고, 신새벽 갠지스강에서 시신을 태우는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그 강물을 그대로 떠 마시는 사람들이 무서웠고, 1달러만 달라고 구걸하는 손들이 무서웠습니다. 그 도시, 바라나시에서 나는 불면증이었습니다. 무서워서 잠들지 못했던 거지요. 그 불면의 밤에 그 깡마른 손의 환영을 본 것이었습니다.
며칠을 불면에 시달리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느끼는 무서움에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가난을 두려워하고, 나를 잃어버리는 신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를 잃어버리기 전에는 나를 찾을 수도 없고, 어떤 일을 하건 신명이야말로 나를 구원할 영성의 한 그물코임을 놓쳤던 거지요. 그렇게 내 속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나서야 불면에서 해방되고, 비로소 바라나시의 소란을 활기로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때 아, 다시 한번 ‘감자 먹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주름진 얼굴, 불거진 광대뼈에 가려 있던 농부들의 순한 눈이 들어옵니다. 그들의 눈은 눈망울이라 해도 좋을 만큼 순하디 순한 소의 눈을 닮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또 보입니다. 나무의 뿌리처럼 불거진 심줄의 손으로 세상에서 가장 맛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의 온전한 식욕이.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캔버스에 유채,
81.5×114.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먹어도 먹어도 피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식탁이 있습니다. 칼로리를 따지느라 음식의 반 이상을 버려야 하는 밥상, 격식을 차리고 남의 눈치를 살피느라 쓸데없이 많이 차려져 있는 밥상은 풍성한 밥상이 아니라 군살 같은 밥상입니다. 밥을 앞에 두고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외교를 해야 하는 밥상도 온전한 밥상이 아닙니다. 온전한 밥상은 밥상이라 부르기엔 완벽하게 허술한 밥상, 밥상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저 밥상입니다. 삶의 허영심이 한 치도 끼어들 수 없는 밥상! 한 톨의 남김도 없이 일용할 양식을 온전히 먹는 사람들, 일용할 양식으로 피를 만들고 살을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가난한 식탁 위의 감자는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기분 좋게 내주지 않겠습니까?
소박한 나무식탁 하나와 그 둘레에 걸터앉은 사람들로 꽉 차는 그 공간의 중심에 램프 하나. 그 램프를 중심으로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그린 고흐는 본능적으로 일용할 양식의 힘을 아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을 그리고 싶었다. 그 손은 그들이 땅을 판 손이기도 하다. 농부는 목가적으로 그리는 것보다 그들 특유의 거친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진실하다. 시골에서는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는, 먼지가 뒤덮인 푸른 옷을 입은 처녀가 숙녀보다 멋지다.”
고흐는 자기 손으로 땅을 파고 김을 매고 열매를 거두어 먹는 농부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고흐는 그들 속에서 그저 황폐하기만 한 가난을 본 것이 아니라 군살 없는 삶을 봤으니까요. 그래서 고흐는 땅을 파는 도구가 되어 거칠 대로 거칠어진 손으로 자신들이 거둔 감자를 먹는, 그 한순간의 식탁을 그리기 위해 농부들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50번 그리는 것으로 부족하면 백번, 그래도 부족하면 또 계속!”
그것은 천부적 재능이 없는 자의 노력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것은 오가며 그집 앞을 지나는 남자의 심정일 것입니다. 매료된 마음에 이끌려, 그리고 또 그리는 반복의 행위는 화두를 들고 또 드는 구도자의 행위 같은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알겠습니다. 왜 고흐가 저 그림을 가장 사랑했는지를. 고흐가 가장 사랑한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를 가장 잘 드러내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이제 나는 저 그림에 감동해 기꺼이 고백합니다. 화사한 옷도 없고, 아름다운 여인도 없고, 한번 살아보고 싶은 동화 속의 공간도 없지만 저 그림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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