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송찬호
가을/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 보내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만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월간 <현대시> 2008 4월호-
콩과 콩밭만으로 그려낸 콩콩 튀는 가을 풍경이다. 장끼며, 노루며, 멧돼지 등도 조연으로 따라 붙었다. 참 명랑 발랄한 가을소묘다. 김용택 시인의 동시 '콩, 너는 죽었다'에 등장하는 튕겨진 콩이 또르르 굴러 쥐구멍으로 들어간 것에 비해선 방향이 다채롭고 비거리도 길어 보인다.
이 시는 지난 주 발표된 제8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이다. 지난해 수상자 문인수 시인에 이어 송찬호 시인 역시 ‘변방의 시인’이다. 충북 보은군이 근거지인 그는 서울 중심의 ‘문단 권력’과는 거리가 멀다. 프랑스에 팬층이 형성돼 있으며, 그의 작품 ‘만년필’은 ‘2006년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시’에 뽑히기도 했고, '구두'는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시의 완성도는 높이 평가받는다.
심사위원들은 '복고적 감각과 언어 미학'의 탁월함이 '미당문학상에 걸맞는 시'라며 입을 모았다.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시 보다는 이런 서정의 시를 더 대접하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내년이면 묵정밭이 될 콩밭에서 허리 굽은 콩밭 주인의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면서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뿐임에도 콩새 먹이 걱정하며 빙그레 웃는 '웃음'이 없었더라면 아마 수상자의 웃음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