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말/정양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시를 아름답게 보일 요량으로 부터 詩語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힐 필요는 더욱 없다. 그 시어가 시의 맥락에 얼마나 충실히 기능하느냐가 관건이겠는데, 시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뱅뱅 겉도는 미사여구 보다는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 시펄"이란 막말 한 토막이 '손등에 얼음'처럼 더 저릿하다. 성층권에서나 내려다봐야 읽힐 정도로 대문짝만하게 쓰진 모래 위 글씨는 마치 외계인과의 내통을 위한 나스카 유적의 기호처럼 은밀하다. '정순'이란 여인은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동선을 잃어버린 옛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왜 철지난 바다에 홀로인지, 모래 위에 대문짝만한 토막 글씨를 썼는지, 누가 읽어줄 것인지 불가사의다. 그래서일까, 막말이 이리 '대책도 없이 아름답다' 오히려 무식한 건 저만치서 번득이면서 달려오는 밀물이다. 투박한 한 사내에게서 아픈 마음을 쏟아내게 하고 떠난 '정순'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에서 외롭고 쓸쓸한 사내의 마음을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 저녁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