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2 2018. 5. 19. 16:52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시를 아름답게 보일 요량으로 부터 詩語를 치장할 필요는 없다. 고운 말로 써야 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힐 필요는 더욱 없다. 그 시어가 시의 맥락에 얼마나 충실히 기능하느냐가 관건이겠는데, 시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뱅뱅 겉도는 미사여구 보다는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 시펄"이란 막말 한 토막이 '손등에 얼음'처럼 더 저릿하다. 성층권에서나 내려다봐야 읽힐 정도로 대문짝만하게 쓰진 모래 위 글씨는 마치 외계인과의 내통을 위한 나스카 유적의 기호처럼 은밀하다. '정순'이란 여인은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동선을 잃어버린 옛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왜 철지난 바다에 홀로인지, 모래 위에 대문짝만한 토막 글씨를 썼는지, 누가 읽어줄 것인지 불가사의다. 그래서일까, 막말이 이리 '대책도 없이 아름답다' 오히려 무식한 건 저만치서 번득이면서 달려오는 밀물이다. 투박한 한 사내에게서 아픈 마음을 쏟아내게 하고 떠난 '정순'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에서 외롭고 쓸쓸한 사내의 마음을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 저녁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