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모든 2 2018. 5. 19. 15:04

 

달팽이 약전略傳 /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생生이 있었다

 

- 시집『귀』(시와시학사, 2005)

 

 

 연체동물인 달팽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집을 소유한 거의 유일한 종이며, 그 나선형의 집은 마치 팽이를 엎어놓은 것 같다. 그러나 난생이며, 암수 한 몸인데다가 두 더듬이와 눈을 가진 이 끈끈한 놈의 본디 고향은 바다이다. 5억 7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바다에서 살다가 해수면이 낮아짐에 따라 어쩔 도리 없이 육지로 그 서식지를 이동하였다. 달팽이에게 있어서 집은 수분 유지와 신체 보호를 위한 수단이지만 서정춘 시인은 이 짤막한 한 문장의 시에서 몸속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 밖으로 빚어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라 하였다. 그것 들쳐 업고 절집 '명부전이 올려다 보이는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가며 기어가는 모습에서 시인은 기실 몸속의 언어를 다 녹여 한 편의 시를 응고해 내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은 아닐까.

 

 찬란한 빛의 광장을 꿈꾸거나 저 넓고 아득한 고향 바다를 몽상하는 것도, 언어의 혓바닥을 통한 참혹한 유희의 사투를 벌이는 것도 '온몸이 혓바닥뿐인' 저 '생生'과 닮았다. 그래서 왠지 쉼표 하나 없이 길게 이어간 한 줄의 문장에서도 달팽이의 여정처럼 숨이 가쁘게 느껴진다. 하이데거가 말한 '언어는 존재의 집'이란 말도 잠시 여기에 머문다. 그러나 집이 아니라 짐일 수도 있는 천형 같은 시를 등에 이고 시인은 28년 동안 달팽이처럼 천천히 생을 핥아가며 살았었다. 서정춘 시인은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지 28년 만에 첫 시집 <죽편(竹篇)>을 내놓았고, <귀>는 그의 네 번째 시집이다.

 

 달팽이는 직사광선과 천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기의 그 물러터진 체중보다 몇 배나 무게가 더 나가는 등짐을 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배로 문지르며 기는 걸음은 느리다 못해 숨통이 터진다. 쉬지 않고 빡시게 긴다 해도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한 시간에 10미터가 될까? 그런 달팽이가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세상 끝 바다로 갈거라(이적의 노래 가사)'고? 아무리 계산해도 불가한 꿈이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남아있는 작은 힘을 다해' 그렇게 바다에 당도했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죽음뿐이라는 걸 달팽이는 알까? 달팽이는 염분에 의한 삼투압 현상 때문에 바닷물에 닿으면 죽는다는 걸 어쩌면 뻔히 알고도 바다를 꿈꾸는 건 아닐까?

 

 마치 시로 아름다운 세상을 도모하는 혁명가의 무모함처럼. 꿈꾸는 몽상가처럼. 물기가 마르면 곧장 유골단지가 되어버릴 달팽이의 집처럼 시의 단지를 이고 가는 시인들의 삶이란 거부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일까? 그래서 남들이 보면 시인으로 살아가는 불행이 자신에게는 아름다운 행복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