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의 맛있는 시읽기

물을 만드는 여자/ 문정희

모든 2 2018. 4. 13. 23:15



물을 만드는 여자/ 문정희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 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리고는 쉬이쉬이 네 몸 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 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2004)


 

  사람의 몸은 우주다. 더구나 여자의 몸은 생산하는 우주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긴 어머니의 역사이자 여성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성의 몸은 여전히 취약하다. 인체공학적으로도 그렇고 사회 환경적으로도 그렇다. '오줌을 갈겨 주고 싶을' 일들이 시와 때도 없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오줌을 면상에다 갈기고 싶을 때는 그나마 봐주고 넘어갈만한 가벼운 성희롱이나 추태의 경우라면, 아동을 대상으로 한 인면수심의 파렴치한과 생명까지 위협하는 흉악범에 대해서는 아예 오줌통에 빠뜨려 다시는 공기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경찰통계에 의하면 의사, 법조인, 교수, 종교인, 언론인, 예술인 등 6대 전문직 종사자가 저지른 성범죄가 최근 5년 간 2천 건도 넘었다니 여성으로서는 믿을 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인과 공무원, 고급장교 등도 물론 예외가 아니다. 40대 후반의 현역 대령이 20대 초반의 여군하사를 상습 성폭행하는가 하면, 세무공무원의 악랄한 성 착취 사건도 있었다.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곳곳에 숨겨져 있는 성희롱과 성추행과 성폭력이라는 야만의 칼끝에 베이지 않으려는 곡예와 같은 삶을 헤쳐가야 함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여성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에는 몹시 취약한 환경이다.


  이 사회와 남성들이 함께 머리 조아리며 집단회개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터진 뒤에야 그때마다 손가락질에 목청을 돋우고 돌을 던지는데, 그에 앞서 분명히 인식할 것이 있다. 여전히 욕정 넘치는 남성에겐 난망한 노릇이겠으나, 바로 시인이 이 시를 통해 던지고 있는 메시지인 생명의 근간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귀히 여기는 일이다. 화장실이 눈에 뛰지 않는 곳에서의 요의는 남녀불문 절대난감이다. 그래도 남자는 사정이 좀 나아 대충 질러 버려도 무방할 정도의 지형지물이 산재해 있다. 얼른 앞방만 가리면 해결할 수 있는 게 또한 남자의 배뇨 자세다. 그러나 여성들에겐 도농 가릴 것 없이 온통 가시덤불이다.


  시인이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말아라'고 하지 않아도 방뇨할 곳은 없다. '대지와 여성이 한 몸이 되어가는' 소리를 지긋이 듣는 대신 짐승들의 기척을 경계하는 일이 먼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성 추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남성의 배뇨 편이성만큼이나 성의 분출을 쉽게 생각하고 성범죄를 둔감해하는 까닭이 아닐까. 남녀 할 것 없이 생명과 삶의 편이 되어 느긋하게 대지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가며 오줌을 볼 수 있는 환경은 정녕 요원하기만 할까. 그리고 이건 다른 이야기인데, 최근 최영미 시인의 꼬지르기 미투까지는 좋으나 방송에서 좀 더 표현을 가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그 인터뷰를 보면 시인들은 유난히 밝히는 하나같이 똑 같은 족속이고 시인 아내를 둔 남편은 시를 때려치우라 그러든가 바깥출입을 단속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