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4주일 2016년 3월 6일(다해)
금사리 성당(논산지구)
본당 설립:1901.4.27/주보성인: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루카 복음,15,1-3,11-32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말씀의 향기>
주님께 갑시다. -윤성균 가브리엘 온양 용화동 주임
오늘은 사순 제4주일이면서 장미주일기도 합니다. 지난 재의 수요일로 시작한 사순절이 어느새 반이 지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에서 마음 먹는게 중요하다는 뜻도 있겠지만,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놓치지 않고 그때 그때 사순절의 본래 의미를 명심하면서 잘 지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되신 어머님의 생전 이야기 하나 하고자 합니다. 노환으로 오랫동안 누워 계셨는데, 누님이 사순절만 되면 "엄마, 사순절이 되어 천국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천당 갈 수 있는데 돌아가셔야 되지 않겠어?" 하시면 어머님은 "사순절이 올해만 있다니, 내년도 있고 내후년도 있다야!"라고 하셨습니다. 괜한 웃음이 나옵니다. 물론 은총의 사순시기가 올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주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 다르게 묵상하고 바로잡아야 할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힘겨운 보속 생활로 속죄의 고행을 잠시나마 쉬면서 복음에서와 같이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아버지의 손을 맞잡으며, 내일의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환희의 장미주일'입니다. 복음에서 탕자의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챙겨 받아가지고, 싫증난 자기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 끝에 알거지가 되었고 때늦은 후회를 하면서 아버지께 돌아가 품위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다시금 가족의 위치로 회복되는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애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조금 더 부언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조차 좋고 감사한 것을 모 느끼며 그저 화려하고 크며 거창한 것에, 그리고 눈요깃감에 신경쓰면서 권력 등으로 좌지우지하는 것에 맘을 빼앗기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세속적인 것에 빠져 신앙생활하는 시간이 없어지지 않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늘 주님께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여기서 굶어 주게 되었구나!" 하는 때는 회복하기가 퍽 어렵습니다. 그런 상황을 피하거나 빨리 하느님의 가족 위치로 되돌아오는 손발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죄사함'받는 것으로 기도와 자선과 단식이 있는데, 사순시기 동안에도 이것을 더 자주, 더 많이 ,더 오랫동안 하는 시기입니다. 평소에 기워 갚지 못한 선행을 배로 갚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여 발치에서 눈 빠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나도록 그쪽으로 갑시다. 아멘
<고해성사 다시 보기(5)>
성찰과 통회, 기나긴 죄악의 어둠을 뚫고..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집인 걸.." 너무도 유명한 "개똥벌레'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들이 의도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한계와 초라함을 체험할 때면 이 노래가 가끔 생각난다. 특히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하면서도 반복해서 같은 잘못과 죄를 범하는 자신을 바라볼 때면 더욱 그러하다.
"주일미사○번 빠졌습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고해소에서 적지 않게 듣게 되는 고백이다. 오랜만에 하는 고백인데도 이런 피상적인 고백을 들을 때면 고해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모르고 있거나 자신이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어떤 경우에는 애써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보려하지 않거나 알고 있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그 안에 숨어 있다는 것도 보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한량없는 그분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비참함을 깨닫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침 혹은 저녁에 실내로 들어오는 강력한 한 줄기의 빛이 평소 잘 보이지 않던 실내의 먼지를 확실히 볼 수 있게 하듯이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은 영혼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어두움을 보게 해 준다. 때문에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려고 노력하는 영혼은 이미 그 과정 안에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여정에는 자신의 어두움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계와 보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을 직면하는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 이것이 '통회(痛悔)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는 아프지 않고는 치유될 수 없고 더 나아갈 수도 없다. 치통에서 아프지 않고는 치유될 수 없고 더 나아갈 수도 없다. 치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환자는 자신의 썩은 이를 뽑아내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래야 더 아프지 않게 된다. 마음과 영혼이 아픈 사람도 낯선 상담자에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상태와 경험을 꺼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영혼에 치유가 일어난다. 이런 까닭에 통회는 영적인 성장통이요 성숙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한참, 참다운 의미의 통회는 자신이 저지른 조이에 대하여 단순히 아파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에서 통회는 하느님 은총의 빛 안에 있는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다윗 왕도 나탄 예언자가 자신을 꾸짖자,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라며 인정하고 고백하였다.(1 사무 12,13) 자신을 괴롭히는 잘못된 과거를 하느님께 내어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뉘우쳤다고 말할 수 있다.
촛불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나를 뒤따르는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통회가 참되면 참될수록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결심 또한 굳건해진다. 오히려 죄와 유혹 앞에 당당해질 수 있다. 이처럼 진정한 통회는 하느님의 사랑받은 우리를 더욱 우리답게 만들어 준다.
-송인찬 신부 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성사 신학)-
<이충무의 행복 나침반(100)>
봄날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장면 #1
결혼 생활 5년쯤 지난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일요일 점심 식사 후 아내가 잠시 외출한 사이 남편이 평소 하지 않던 설거지를 시작합니다.
평소 아내를 돕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에 갑작스런 '양심충동'이 생긴거죠.
외출했다 돌아온 아내가 남편이 해놓은 설거지 그릇들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남편에게 퉁명스럽게 이렇게 말 한마디를 던집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왕 하는 거 청소도 좀 하지 달랑 설거지만 해놨네!"
이럴 때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 맞다! 청소까지 했어야 되는데 내 생각이 짧았네!"라고 할까요?
아니면 "내가 괜한 짓을 했어! 내가 다시는 설거지 하나 봐라!"라고 할까요?
장면 #2
똑같은 상황에서 결혼 생활 5년쯤 지난 또 다른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외출했다. 돌아온 아내가 남편이 해놓은 설거지 그릇들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남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설거지하고 청소하려 했는데, 일 하나가 줄었네, 정말 수고했어!"
이럴 때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 괜히 설거지 했다. 청소까지 하라고 하면 어쩌지?"라고 할까요? "아, 기분 좋다. 청소할 때에도 같이 해야겠다!"라고 할까요?
이제 3월, 드디어 '봄'입니다. 앙상한 가지에 꽃들이 생일을 맞는 봄.. 하지만 봄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찾아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사람의 봄날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먼저 따뜻해져야 비로소 시작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봄날.. 이 신비한 봄의 이치를 되새기며 우리에게 진정한 봄날을 선물하신 주님의 부활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이 충무 바오로/극작가, 건양대학교 교수-
오늘이라도
돌아가
어제의 상처를
보살핀다면
아픔이 치유되어
새살의 삶이
오늘이고
내일일 것입니다.
글. 그림 이순구(베네딕도)
마음 살핌 -마르틴 부버-
북부 백러시아의 랍비였던 슈뇌르 살만(+813)옹이 페터스부르그에서 투옥됐었다. 그의 사상과 생활에 대해(하씨딤의 적들인)밋나딤이 정부에 무고했기 때문이었다.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간수장이 감방에 들어왔다. 묵상에 깊이 잠겨 처음에는 누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던 랍비의 근엄하고도 평온한 얼굴을 보고 제 나름대로 생각있는 간수장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갔다. 그래서 죄수와 이야기를 차차 나누면서 자기가 성서를 읽다가 떠올랐던 것들을 몇 가지 물어보았다.
마침내 <전지하신 하느님이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하셨는데, 이 말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들어야겠습니까>하고 물어보았다.
랍비는 <성서가 영원하고 모든 시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거기 담겼다고 믿습니까>하고 되물었다.
<네, 믿지요.>하고 그는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시대마다 하느님은 사람 하나하나에게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네게 주어진 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까지 와 있느냐' 고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하시는 말씀은 말하자면 하느님이 '너는 이제 마흔여섯 살을 살았는데 그래 어디쯤 와 있느냐'하는 식이지요>하고 사딕(의인)은 말했다.
간수장은 자기 나이를 듣자 정신이 번쩍 들어 랍비의 어깨에 손은 얹고는 <암, 그럼요.>하고 외쳤으나 마음은 떨렸다.
-하씨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 中-